기표의 공간, 시간의 흔적
Spaces for Signifiers, Traces of Time
정현
미술비평가, 인하대학교

2023. 5.


“부유한 예술 후원자들과 뉴욕의 문화 엘리트 구성원들이 이상한 망이나 그물에 걸린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하고 그림을 보기 위해 작품과 접속하는 동안, 많은 아이들은 전시장 중심부에서 결국 자신을 위한 공간을 조각합니다.” 1

유럽에서 이주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모아 미국 뉴욕에서 최초로 열린 초현실주의 단체전 First papers of Surrealism(1942)은무엇보다 마르셀 뒤샹의 전시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뒤샹은긴 끈을 이용해 전시 공간 전체에 거미줄 같은 망을 설치하여 전시 감상이라는 부르주아적인 행위를 훼방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은 작품 중심의 관습적인 감상 문화를 비평적 실험의 대상으로 전복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유럽의 오랜 전통에서 탈주 하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런 도발이 가능했던건, 아마도 초현실주의조차 양식화되어가는 현실을 뒤집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화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부유하고자 했으나 기호와 상징은 어느새 회화의 문법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뒤샹은 의도적으로 (관습적인) 감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도록 그물처럼 공간을 엮어버렸다. 그러자 천진한 아이들이 그 안에서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어진 것과 상상한 것,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틈새를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발견하고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틈, 다공성

공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은 동일하지도 단일하지도 않다. 공간은 우주의 탄생과 이어져 있으며 시간과 결합하여 생성 ․ 소멸 ․ 순환 하는 개념이자 현상이다. 공간은 소유의 대상이라기보다 존재론적 세계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 예컨대 서구문화권의 언어는 공간을 넓이, 간격, 사이, 장소, 지역, 비어 있는, 허공, 공백 등으로 풀이한다. 공간을 물리적으로 보는 측면이 유독 드러난다. 한편 한자문화권에서는 조금 더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공간을 다룬다. 사전적 정의만 보아도 쉽사리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 상하 ․ 전후 ․ 좌우로 끝없이 퍼져 있는 빈 곳, 2. 쓰지 않는 빈칸, 3.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4. 일반적으로 점의 집합을 말함. 직선을 일차원, 공간 ․ 평면을 이차원, 입체를 삼차원이라 부름, 5. 물체의 배열이나 상호 관계를 반영한 양의 총합을 나타내는 경험적인 개념, 6. (어떤 일에서) 앞뒤가 순조롭게 연결되지 않아 생기는 빈 구멍. 2 위의 사전적 정의는 거시적인 측면부터 미시적인 관점까지 두루 아우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여하튼 동서양 모두 공통적으로 공간이란 빈 곳(비물질)이면서 동시에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공간은 유기체와 무기체, 물질과 비물질, 정신과 신체, 비어 있는 것과 채워진 것의 사이에서 생성된다고 유추할 수 있다. 다시 1942년의 초현실주의 전시로 돌아가보자. 뒤샹이 전시장에 만들어 놓은 그물망은 공간의 원래 목적에 벗어나 있지만, 덕분에 아이들은 형식적으로 작품을 이해하기보다 자유롭게 작품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어진 것 너머를 탐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공간을 발견하면서 시간도 생성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 원형으로서의 공간 그 자체를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현실은 공간을 기능으로, 경제적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이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를 통한 상상, 공간에 대한 시적 사유를 했던 가스통 바슐라르 (G. Bachelard)는 철학자의 서랍과 서류함을 통하여 몽상의 시간을 얻었다. 그는 왜 이런 일상의 사물에 유독 관심을 가졌을까? 옷장이나 다락은 사물을 보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그 공간의 냄새에 반응한다. 추억이 깃든 물건, 손때 묻은 장난감, 낡은 옷의 먼지 냄새가 자극하는 정동(affect)이야말로 빈 곳의 존재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롱 속에는, 한없는 무질서에서 집 전체를 보호하는 질서의 중심이 살고” 있다고, 그리고 “질서란 단순히 기하학적인 것은 아니다” 3 라고 덧붙인다. 실제로 공간은 물리적 ․ 심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주변의 자극과 우연 등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성, 소멸, 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만, 공간과 형성된 관계는 무질서 속의 질서, 즉 카오스모스(chaosmos)를 향해 공간을 추상적 ․ 질료적으로 전환 또는 전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간의 주체는 누구일까?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발터 베냐민(W. Benjamin)은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안과 밖의 경계 공간을 따라다녔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혼재한 무질서한 나폴리 거리의 광경을 흥미롭게 주목했다. 그는 이 카오스의 상태와 관련해 관습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안과 밖, 위와 아래를 이어주는 비질서의 세계가 접속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마치 초현실주의 전시장에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자발적으로 생성한 것과 같은 혼융의 상태를 목격한 후, 이를 “다공성”(porosity)이라 불렀다. 베냐민은 도시를 여러 겹의 시간과 이념이 혼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도시를 활용한 태도와 유사하다. 그들은 도시를 객관적으로 보는 동시에 어렴풋한 꿈처럼 바라보았다. 특히 소비와 향락에 도취된 도시의 생활 방식과 거리를 둔 채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를 따라가며 그들만의 지도를 그렸다. 즉 공간이란 물리적인 부피와 이념에 의하여 완성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 흔적, 경험과 같은 기억이 담긴 시간의 켜가 쌓임으로써 생성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벽, 닫힘과 열림 사이

서혜영은 공간의 작가다. 그의 공간은 육면체의 벽돌에서 출발 한다. 벽돌은 그 자체로 이미 공간인 동시에 공간을 구축하는 단위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벽 이미지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없다. 현대인에게 매우 익숙한 형태이면서 익명적이고 반복성을 띤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을 통해 작가는 공간이 지닌 현상이 매우 모순적이며 이중적임을 질문하는 듯하다. 벽 이미지는 그야말로 벽돌의 역사를 표상하는 기호에 머문다. 하지만 문제는 벽돌이 공간을 표상하는 기본적인 형태이면서 동시에 속이 꽉 찬덩어리(solid, mass)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서로 모순된 두 항을 충족시킨다. 서혜영은 빈 곳과 채워진 곳을 이항 대립하기보다 양가적인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러한 양가성에 대한 물음이 그의 조형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체’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초기 설치작업 Voided Void(2001) 는 벽돌로 벽을 쌓은 드로잉을 전사한 얇은 반투명 천으로 제작된 가변적인 공간으로, 공간 안에 또 다른 공간을 기입하여 원래 공간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 작업이다. 벽 이미지는 서혜영 작업의 조형적 모티프이자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작업의 원천 (origin)이기도 하다. 이 유동적인 벽체는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열림과 닫힘이 계속 순환하는 모호한 상태의 공간이 된다. 김홍기는 이러한 시공간적인 모순에 대하여 “이쪽 에서 저쪽이 비치는 반투명한 막, 신체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외부의 양분을 체내로 통과하는 피부와 같다” 4 고해석한다. Voided Void는 우리에게 익숙한 벽 이미지를 통하여 공간을 사유하는 이분법적 개념인 공동(共動, void)과 고체 (solid)의 구분을 중화시킨다.

한편 벽 이미지를 원형 삼아 제작된 ectype는 비정형적인 모듈로그 형태가 단일하지 않기에 조합에 따른 다양한 변형이 가능한 작업이다. ectype는 모형, 복사, 그리고 건축적인 의미로는 부조로 풀이된다. 서혜영의 ectype는 벽 이미지의 선형적 형태를 모티프로 한 벽면이면서 동시에 일정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빈공간이 반복적으로 구성된 부조 모듈이다. 벽 이미지라는 원형을 재가공하여 모듈화한 작업으로 한시적으로 전시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영토화(territorialization)한다. 질 들뢰즈(G.Deleuze) 는 세계를 기계로 보았다. 또한 세계를 작동시키는 움직임과 에너지를 생성하는 내연 기관의 작동을 접속(connexion), 이러한 관계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배치(agencement) 라고 불렀다. 이 과정을 통하여 다양체가 생성되는데, 이를 두고 영토화가 되었다고 비유한다. 서혜영의 설치작업은 ectype 모듈들이 서로 접속하여 전시 공간에 배치되면서 유사한 형태들의 변주와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다양성이 산출되는 과정이다.
이어서 모듈 조합에 따라 시각적인 다양성뿐만 아니라 이를 음악적으로 전유하여 비가시적인 차원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시각적인 차원뿐 아니라 청각적인 가능성도 발견할수 있다. 모듈화된 작업을 하나의 멜로디로 비유한다면, 새로이 마주한 공간의 구조와 성질에 따른 조형성의 변화를 다양한 리듬으로 환원해볼 수도 있다. 들뢰즈는 반복되는 후렴구를 뜻하는 리토르넬로(rittornello)를 대지의 목소리라고 불렀다. 인류의 역사는 영토의 주권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철학자는 우리에게 반문한다. 과연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그는 역사 이전으로 되돌아가 땅의 원주인을 상상한다. 그렇게 새들의 지저귐은 의미를 얻게 된다. 새는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이질적인 존재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리토르넬로이다. 땅이 내는 소리, 그것은 땅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체의 신호인 것이다. 마치 새처럼 비정형적인 모듈들은 전시 공간의 모서리, 기둥 사이, 벽과 천장 사이 등 예측 불가능한 곳에 자리를 편다. 갤러리와 같은 익명의 공간은 자신의 목소리, 음악을 가지기 어렵다. 이처럼 비어 있음은 또한 새로운 가능성의 숙주가 될 수 있다(Ectype 1702, 2017/ Ectype 1503, 2015).

서혜영의 작업을 미니멀리즘 작가 솔 르윗(Sol LeWitt)의 모듈식 작업과도 비교해볼 수 있겠다. 솔 르윗의 모듈작업은 큐브를 증식시킨 듯 보이는 그리드 구조의 입방체를 지속적으로 변주하였는데, 그야말로 큐브들이 조형적으로 얼마나 다양하고 흥미롭게 증식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제안함으로써 입체주의 세계관을 공업화된 구조로 전유한다. 한편 서혜영의 모듈은 비정형적이면서 동시에 임의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 모듈은 일반적으로 표준화된 방식으로 대량생산하기 때문에 정형화된 틀에 구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모듈은 구부러진 각도와 모듈과의 연결 지점을 달리함으로써 모듈적이면서도 개별화되어 늘 변주가 가능한 리토르넬로가 이뤄질 수 있다. 이러한 비정형성은 솔 르윗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에바 헤세 (Eva Hesse)의 임의적 설치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헤세와 서혜영은 매우 다른 톤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의 재현이 아닌 여성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조각의 방식과 질료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도전적이면서도 지적인 자극을 주는 동력이 된다. 예술은 자유를 지향하지만 예술이 곧 자유의 실현은 아니며, 나아가 예술 행위가 자유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두 작가의 느슨한 교차점에 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다뤄봄 직한 주제인 듯하다.

하나의 전체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연작 Ubiquitous(2003)는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의 회화를 완곡하게 참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를 버리고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동정녀 마리아와 가브리엘 대천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들 주변으로는 여러 겹의 벽면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어린 마리아의 숭고한 몸짓과 대천사 가브리엘의 신성한 제스처로 만인에게 인간으로 탄생할 신의 계시를 알리는 장면은 기독교 신화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색과 인물의 몸짓이 지워지자 (또는 가려지자) 두 인물은 마치 물질인 동시에 비물질적인 공간이 된것만 같다. 작품 표제 Ubiquitous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또한 멀티버스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위치와 시간의 순서 사이에 상관 관계가 뒤틀어져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Ubiquitous야말로 ‘하나의 전체’라는 작가의 세계관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무용한 예술품과 유용한 사물 사이에 위치한 유닛 조합체인 Floating Units(2023)는 사용자에 의해 쓸모를 발견할 수있으며, 그 쓰임새는 공유와 사유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유와 사용의 기준을 무너뜨린다. 그의 작업을 견인하는 표제이자 주제 “하나의 전체”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다. 하나가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 논리는 사회 심리학에서 주로 다뤄진다. 하지만 서혜영의 “하나의 전체”는 유기적인 관계성보다 비유기적이면서도 조응하고 접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무조건적으로 유기적인 상태를 추구하거나, 세상이 바라는 존재가 되기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접속하고 분화하면서 더욱 이질적이고 모호한 상태로 나아간다. 요컨대 “광장”(2010)을 보면 그야말로 텅 빈 공터가 등장한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비스듬한 마름모꼴 형태의 공터 주변에 위치한 건물과 입구의 계단이 어딘지 모르게 엄격하게 보인다. 이처럼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장면은 그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데도 감상자 개인의 기억을 건드린다. 그의 작업은 매우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서 광장이란 표제는 모순적이다. 그곳은 광장보다 밀실에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 에서 바깥에 갇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밀실은 폐쇄적이고 광장은 개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이분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안과 밖, 여기와 저기, 공간과 시간의 관계는 서로의 경계에서 진동한다. 마지막으로 근작 “남겨둔 가지”(2023)는 식물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작업이다. 여기서 남겨진 가지란 가지치기를 의미한다. 가지치기는 나무를 아름답게 조형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나무의 건강과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적극적 개입이다. 가지치기라는 행위는 이처럼 미와 생명을 포괄한다. 게다가 “남겨둔 가지”는 작가가 을지로의 한 금속사에서 20년 전에 제작한 황동볼을 우연히 발견한 일화가 덧붙여져 다른 작업과는 달리 서사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 일화는 2000년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잊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남겨둔 가지는 염세적으로 본다면 한없이 쓸쓸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지의 강한 동세와 섬세하게 세공된 황동볼의 존재는 물질과 기억의 관계를 또렷하게 공명한다.

끝으로 나는 서혜영의 작업실에서 20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전시를 기다리는 분해된 작업들과 그 기간을 함께해온 사람들이 남긴 글과 기록물을 뒤적거리며 마치 작가의 시공간을 평행우주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업실 공간을 채운 음악 소리만이 유일하게 낯선 느낌을 중화시켜주었는데, 작가의 궤적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현재의 시간에서 울리는 음악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또한 익명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조형작업 사이에 놓인 트레이싱지 위에 연필과 색연필로 그린 드로잉과 “남겨진 가지”의 황동 체인 사이에 매달린 비즈왁스는 내게 유독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드로잉과 비즈왁스가 조각과 설치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를 매개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단시간에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예술이라는 공유지에서는 실제의 시공간을 넘어 작가의 말과 몸짓,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통하여 조심스레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한다.


1. David Hopkins, Duchamp, Childhood, Work and Play: The Vernissage for First Papers of Surrealism , New York, 1942. Wealthy art patrons and members of New York’s cultural elite milled around, attempting to make what they could of the strange web or net in which they were caught, peering through it to look at the paintings, while a number of children wove in and out of the guests, eventually carving out a space for themselves in the central area of the exhibition. (원문 발췌), 저자 강조. https://www.tate.org.uk/research/tatepapers/22/duchamp-childhood-work-andplay-the-vernissage-for-first-papers-ofsurrealism-new-york-1942 (2023년 5월 1일 방문).
2. 네이버 사전.
3.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03, 176쪽.
4. 김홍기, 전시 도록 「긴밀한 경계, 분리와 결합의 변증법」, 갤러리소소 2016

“Wealthy art patrons and members of New York’s cultural elite milled around, attempting to make what they could of the strange web or net in which they were caught, peering through it to look at the paintings, while a number of children wove in and out of the guests, eventually carving out a space for themselves in the central area of the exhibition.” 1

First Papers of Surrealism (1942), the first group exhibition of immigrant surrealist artists from Europe held in New York, United States, became known, more than anything, for its design by Marcel Duchamp. Duchamp’s so-called “mile of string” installation threaded the entire exhibition space like a cobweb to hinder the bourgeois act of viewing an exhibition. This active intervention must have been an opportunity to subvert the conventional work-centered exhibitionviewing culture into a subject of a critical experiment. It also seems to imply a will to break away from the long European tradition. Perhaps what made this type of provocation possible was the desire to overturn the reality in which even surrealism was becoming stylized. This was because, while surrealist painting sought to hover in the unconscious world, signs and symbols remained tied by the grammar of painting. Consequently, when Duchamp threaded the space like a net to intentionally thwart the conventional viewing experience, ingenuous children began to create their own invisible spaces within the exhibition space. After all, children are instinctively capable of discovering and practicalizing the gap between what’s perceptible and imperceptible, given and imagined, and material and immaterial.

Holes in spacetime, the porosity

So, what is space? No two spaces are identical nor is any one space singular. Space is tied to the birth of the cosmic universe; it is a concept and phenomenon conceived, extinguished, and circulated in connection to time. Space is less a subject of possession and more in touch with the source of the ontological world. Linguistically, Western culture synonymizes it with “area,” “distance,” “gap,” place,” “region,” “emptiness,” “void,” or “vacuum,” which reflects a more physical view of space. On the other hand, the Chinese language-based Eastern culture approaches space from a wider yet more detailed point of view. The difference can easily be detected in the Korean dictionary definition of space: 1. An empty area that endlessly extends in all directions; 2. Unused blank; 3. Both physical and psychological expanse; 4. Generally, a set of points (a line, plane, and solid object are referred to as one, two, and three-dimensional space respectively); 5. An empirical concept representing the totality of quantities that reflect the arrangement or interrelationships of objects; 6. An empty hole formed as a result of a discontinuous event. 2 What is noteworthy about the above definitions is that it covers everything from a microscopic view to a macroscopic one. In any case, both Eastern and Western cultures see space as something that is empty (immaterial) yet simultaneously with a physical form. As such, space can be seen as being formed in the gap between the organic and inorganic, material and immaterial, mental and physical, and empty and full. Let us revisit the surrealist exhibition of 1942. The net Duchamp installed in the exhibition space deviated, from the space’s original purpose. However, this is precisely what allowed children the freedom to form their own relationships with the works and to explore beyond what was presented, rather than understanding the works only perfunctorily. While discovering new space, the children must also have generated time. The fact is that it is extremely difficult nowadays to encounter a space that is an archetype unto itself. This is because reality treats space as a function, an economic means, or a political end. Gaston Bachelard, a scientist and philosopher who had a poetic approach to space and elemental imaginations that make up the world, indulged in daydreams through the likes of drawers, chests, and cabinets. Why was he so intrigued by objects as mundane as wardrobes and drawers? Closets and attics serve the function of storing things, but what people react to is the smells that inhabit such spaces. The affect (a subjective feeling experienced in response to a stimulus) triggered by the smell of memorable objects, finger-stained toys, dust, and old clothes is what truly reveals the presence of the empty space. “In the wardrobe there exists a center of order that protects the entire house against uncurbed disorder,” Bachelard remarks, adding, “Order is not merely geometrical.” 3 In reality, space is bound neither by physics nor psychology but is, rather, constantly created, destroyed, and circulated through interactions with surrounding stimuli and coincidences. Physical space is fixed, but relationships forged with a space will convert or overturn it abstractly and materially to head towards order amidst disorder, that is, “chaosmos.”

Who, then, is the central agent of space? Who creates it? Or does it create itself? Walter Benjamin, who surveyed the shopping arcades of Paris, which border interior and exterior spaces, paid particular attention to the chaotic street scenes of Naples, where the public and private were intertwined. In regarding this state of chaos, he recognized that a world of disorder, accessing the conventional order from the outside, bridges the inside and outside, and the top and bottom. After witnessing this state of disorderly fusion, much like the one caused at the surrealist exhibition where children spontaneously created invisible space, Benjamin used the term “porosity” to describe it. Benjamin sees the city as something formed as a result of multiple layers of time and ideologies coming together, which is similar to the attitude with which surrealists used the city. They viewed the city both objectively and as if through a hazy dream, distancing themselves from the urban lifestyle of consumption and indulgence, they followed the streets stained with traces of the past to draw their own map. This shows that neither physical volume nor ideology completes a space; a space is a phenomenon created through accumulated layers of time—something embedded with the unconscious, memories, traces, and experiences. The wall, somewhere between open and closed Haiyoung Suh is a space artist. Her spaces begin from a hexahedral brick. A brick is already a space unto itself and simultaneously, a space-constructing unit. The truth is, there is nothing special about Suh’s wall images. The walls take an anonymous and repetitive form extremely familiar to modern-day people, but it is through this very point that the artist seems to question the paradoxical and equivocal nature of space as a phenomenon. The image of a wall itself remains nothing more than a symbol representing the history of bricks, but the point of contention is the fact that the brick is simultaneously a basic form representative of space and a solid mass. It satisfies two contradictory terms. Rather than creating a binary confrontation between something full and something empty, Suh seeks to pull the two into an ambivalent world. This question of ambivalence may be in line with the concept of “one and its entirety” that runs through her formative spectrum. Though excluded from this exhibition, her early installation Voided Voids (2001) is a variable space produced using a thin fabric with a drawing of a brick wall transferred onto it, intended to obfuscate the identity of one space by imprinting it with another. This wall image is a motif for Suh’s sculptural works as well as the origin of her work, to which she constantly reverts. This fluid wall form becomes a space in an ambiguous state where the interior and exterior are connected like a Möbius strip to create a perennial cycle of opening and closure.
Critic Kim Hong-ki interprets this spatiotemporal paradox as follows: “It is like a translucent membrane through which one side can be seen from the other, like skin that shields the body from external danger while simultaneously passing external nutrients through to the inside.” 4 Through the familiar image of a wall, Voided Voids neutralizes the dichotomous conceptual distinction of space as either a “void” or a “solid.”

Meanwhile Suh’s ectype series, involving the use of an atypical module produced with the wall image as an archetype, does not have a singular fixed form and, can therefore be combined into various forms. The title is interpreted as “model,” “replica,” and “relief” in architectural terms. Modeled after the linear wall image, ectype is both a wall and a relief module composed of empty holes, which repeat in regular intervals. This modular work temporarily territorializes the exhibition space as its own. Gilles Deleuze saw the world as a machine, the engagement of the internal engine that generates the movement and energy that operate the world as “connection (connexion),” and the process of restructuring these relationships as “assemblage (agencement).” Diversity is born through this process, which Deleuze likens to “territorialization.”
Inside the exhibition space, where Suh’s ectype modules are installed in assemblages to interconnect with one another, the variations of similar forms beget interactions—a process that breeds diversity. What can be detected in turn is the possibility of visual diversity attributed to different module combinations and furthermore, the possibility of the visual diversity being musically appropriated to tap into the invisible dimension. In this sense, the work not only has visual potential but also auditory potential. If a single module could be likened to a melody, the structure and properties of the renewed space and the ensuant changes in its formativeness could be deemed various rhythms. Deleuze used the Italian word ritornello, a recurring passage in music, to refer to the voice of the land. The history of humanity can be seen as an endless struggle to secure territorial sovereignty. The philosopher asks us in return, “To whom does the land belong?” He looks back to prehistoric times to picture the original owner of the land, and in the process bird songs attain meaning. Birds continue to warn alien creatures that invade their territory—the ritornello as described by Deleuze, that is, the sound made by the earth or the signals sent by a life form that lives in connection to the earth. Like the birds, the atypical modules are nested in the most unpredictable spots around the exhibition space—in the corner, in between columns, and in between the walls and ceiling. It is seldom that a space as anonymous in nature as a gallery gains a voice or music of its own, but as seen, emptiness can also serve as a host of new possibilities. (Ectype 1702, 2017/Ectype 1503, 2015).

Suh’s ectype is also comparable to minimal artist Sol LeWitt’s modular works—a series of variations in which cubes in grid structures seem to multiply endlessly. These works appropriate the cubist worldview by using an industrialized structure, and experimenting with and proposing the extent of formative diversity and interesting forms to which cubes can be proliferated. Meanwhile, Suh’s modules are both atypical and arbitrary in nature. As modules are generally mass-produced in a standardized manner, they are often bound to a typical framework. Suh’s modules, however, are bent and connected at varying angles and points, which gives them a modular yet individualized quality, allowing for a constantly variable ritornello. This type of atypicality calls to mind the arbitrary installations by Eva Hesse, LeWitt’s close colleague. Hesse and Suh obviously work in completely different tones, but the sculptural mode they employ to reveal femininity without direct representation of the female form and their imaginations of material possibilities share an impetus—one that’s both challenging and intellectually stimulating. Art is freedom-oriented, but it doesn’t always achieve freedom, nor does the practice of art guarantee freedom. The loose point of connection between the two artists is something worth further discussion.

One and its entirety

Ubiquitous 1, 2, 3, and 4 (2003), four parts of a serial work produced based on the theme of the Christian Annunciation, euphemistically references the paintings of Renaissance masters. What stands out about this work is the image of the Virgin Mary and the Archangel Gabriel, which appear as silhouettes, rid of the magnificent colors they’re known for. Around the two figures layers of walls appear as a backdrop. The original scene in which young Mary’s sublime body language and Archangel Gabriel’s divine gesture annunciate the birth of Jesus as God’s revelation to humanity, captures the most climactic moment in Christian mythology. By erasing (or obscuring) the symbolic colors and body language, the two figures become a space of sort—something simultaneously material and immaterial. Moreover, the title Ubiquitous, meaning “present, appearing, or found everywhere,” takes on the multiverse worldview. For something to be present both here and elsewhere, the correlation between its position in space and the sequence of time must be distorted. In that sense, Ubiquitous has to be the work that best reflects the artist’s outlook on the world, namely, “one and its entirety.”

Floating Units 2023 (2023), unit combinations that fall somewhere between useless art and useful objects, can serve functions as determined by users, and the functions, traversing the boundaries of private and public ownership, dismantle the ideas of possession and use. “One and Its Entirety,” the title and theme of Suh’s work at large, is a concept frequently discussed in Gestalt psychology. The idea that an individual constituent can affect the larger whole is mainly dealt with in social psychology, but Suh’s idea of “one and its entirety” places more weight on the possibility of a relationship that’s inorganic yet adaptable and accessible, rather than an organic one. The disparate elements in her works converge and diverge as they seek to advance to a more extraneous and ambiguous state rather than blindly pursuing an organic state or becoming something desired by the world. Her work A Square (2010), for example, depicts a literally vacant lot. The building with stairs in front of the entrance surrounding the oblique, rhombic lot, which takes up most of the frame, appears somewhat stern. The faint, vaguely discernable scene denies any explanation but, at the same time, nudges the viewer’s personal memory. Her works seem strictly objective and yet have the opposite effect of conjuring subjective emotions. The title, A Square, serves a paradoxical role here as the vacant lot appears much more like a closed chamber than an open square. In his book The Poetics of Space (2003), Bachelard talks about being trapped outside. People generally associate chambers with closedness and squares with openness, but reality isn’t always so dichotomous. The relationship between space and time creates resonance on the border between the inside and outside, between here and there. The last and most recent work, Prolongement 2023 (2023), resembles a plant. The Korean title, which translates to “left-behind branches” or “spared branches,” refers to the branches left intact after pruning—an active mode of intervention used to aesthetically shape a tree while also ensuring its health and extending its lifespan. As such, the act of pruning encompasses the values of beauty and life. On top of that, the work comes with an anecdote about the artist accidentally coming across brass balls produced by a metal shop in Euljiro some 20 years ago, adding a narrative aspect to differentiate it from the rest of her work. This anecdote forces us to question what Korean society, having undergone rapid growth since the early 2000s, has lost and forgotten in the process. From a pessimistic point of view, the “left-behind branches” may come across as infinitely desolate, but the tree’s paradoxically dynamic movement and the presence of the exquisitely crafted brass balls lucidly reverberate the relationship between material and memory.

As I rummaged through Suh’s studio, the disassembled works that spent two decades with her waiting to be exhibited, and the written and other records left by her contemporaries, I felt as though I was gazing over at her space-time from a parallel universe. The sound of the music filling the studio space was the only thing that pacified this strange feeling, and I found my last comfort in the music resonating in that present moment as I strove to trace her past footsteps. Amidst the anonymous yet geometric sculptural works, the pencil and colored pencil drawings on tracing paper and the beeswax hanging from the brass chain of Prolongement came across as particularly moving. It almost felt as if the drawings and beeswax were mediating the past and future amid the sculptures and installations. Assessing someone’s life in a short amount of time is no easy task. However, with art as our common ground, we might be able to transcend our physical space and time and discover subtle links in the artist’s words and gestures, in the material and immaterial things.


1. David Hopkins, “Duchamp, Childhood, Work and Play: The Vernissage for First Papers of Surrealism, New York, 1942,” https://www.tate.org.uk/research/tate-papers/22/duchampchildhood-work-and-play-the-vernissagefor-first-papers-of-surrealism-new-york-1942 (accessed: May 1, 2023).
2. NAVER dictionary.
3. Gaston Bachelard, The Poetics of Space, trans.Kwangsou Kwak (Seoul: Dongmunseon, 2003), 176.
4. Hongki Kim, Close Boundaries, the Dialectic of Separation and Union,, Gallery Soso, 2016, exhibition catalog.



정소라


2017. 12.


이번 전시 <이졸라 프로젝트 두 번째ISOLA Project II>는 KAIST 경영대학 슈펙스Supex 건물 내에 있는 아트리움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새로운 조형적 요소를 더해 예술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서혜영 작가의 일회성 프로젝트이다. 서혜영 작가는 초창기부터 줄곧 선보였던 ‘벽돌 모티브brick motive’에서처럼, 각각의 유닛이 모여 전체를 형성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고립과 결합의 작용들에 주목해왔다. 그러한 작용들에 대한 주목은 주체와 타인 간의 소외와 관계 맺음에 대한 은유, 더 나아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새롭게 아트리움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로 한정되어 있던 그간의 전시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기존의 전시 공간에서는 작가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사한 자료들과 제작한 모형들을 아카이브 형태로 전시하여 관람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전시의 제목인 ‘isola’는 이탈리아어로 ‘섬’을 뜻하며 ‘고립시키다’는 의미의 단어 ‘isolare’에서 파생되었다. 서혜영이 만들어내는 추상적 형태의 유닛들은 일상적 공간에 개입함으로써 기존의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작가가 고안한 조형적 요소들은 매우 단순한 형태이지만 고정되고 부동이던 공간에 개입함으로써 어떤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 파괴와 심적 불안을 야기하는 균열이 아니고, 생산적인 긴장을 유도하는 균열로서 작용한다. 다수의 익명에게는 익숙한 어떤 장소에서 시도되는 작가의 개입은 안정과 변화의 변증법적 단계를 거쳐 새로운 미적 경험의 공간을 생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유닛들의 결합으로 생긴 반복된 형태는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인 리듬을 형성하며, 공간에 미세하지만 자율적인 움직임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와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렇게 조립이 가능한 여러 개의 유닛 형태의 분리와 연결은 마치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주변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섬, 더 나아가서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서혜영의 작품들은 우리가 개별적 존재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작은 유닛이지만, 하나의 전체는 매순간 변화하는 생명력을 지니며 그래서 의미 있는 빛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주요하게 활용되는 아트리움 공간은 유리창이 벽, 천장 등 공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장소적 특징을 지닌다. 유리라는 매체는 외부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외부적 시선을 투과시킨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이자 연결인 유리창에 입혀진 여러 유닛들, 즉 색면들의 조합은 프로젝트가 지속되는 두 달간 새로운 방식으로 공간의 내, 외부를 관계 짓고 그 공간 속을 오가는 이들에게 낯설지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고립된 존재이자 수많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의 존재 방식을 통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exhibition, < ISOLA Project II>, is a one-time project by Haiyoung Suh, who transforms the ordinary space of the Atrium in the SUPEX building of KAIST College of Business into an artistic space with new formative elements. As shown in her early stages in the ‘brick motive’, Suh has been focusing on the isolation and bonding effects that occur in the formation of the whole unit. The attention to such effects is evaluated as a metaphor for alienation and connection between subject and others, and furthermore, a deep reflection on human existence. In this exhibition, the artist utilizes the Atrium as an exhibition space to expand the exhibition area that was limited to ‘Research and Art Gallery.’ In the existing exhibition space, the artist displays the materials and the models she produced in archive forms to help viewers understand them.

The title of the exhibition, ‘ISOLA’, meaning ‘island’ in Italian derives from the word ‘isolare’ which means ‘isolate’. Suh’s abstract units intervene into everyday space to disassemble and reconstruct existing space. The formative elements that the artist devised are very simple forms, but they intervene the fixed and immovable space causing cracks. These cracks, however, are not cracks that cause physical destruction and mental instability, but instead act as cracks to induce productive tension. The artistic intervention attempted at a space that is familiar to many but unusual to the artist results in the creation of a new space of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dialectical steps of stability and change. Repetitive forms resulting from the combination of units create a visible but invisible rhythm, giving the space minute autonomous movements, new energy and vitality. The separation and connection of multiple units that can be assembled reminds people of the characteristics of an island that is isolated and related to its surroundings, and even human beings. These works of Suh show that people are small units of individual beings that make up a one whole unit and the one whole unit has a changing vitality every moment and thus emits meaningful light.


The Atrium space, which is mainly used in this exhibition, has a spatial feature of glass windows occupying a large portion of the area such as walls and ceiling. The medium of glass makes it possible to view the outside scenery and at the same time to transmit the external gaze. Haiyoung Suh created various types of triangular units to intervene at the intersection of the indoor landscape of the atrium and the outside campus landscape. The combination of these units, which are the demarcations and the connections between the inside and the outside, will define a new way to relate the inside and the outside of the space, add a landscape onto another landscape, and give new experiences unfamiliar to those who move in and out of the space during the two months of the project. These experiences will be an insight into our way of being, being isolated and connected with many others.





서혜영은 벽돌의 작가이다. 어느덧 15년 이상 그의 작업은 한결같이 벽돌이라는 모티프를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작업의 형식은 때로는 드로잉으로 때로는 조각으로 달라지지만, 그 창작의 첫걸음은 언제나 이차원적 공간이나 삼차원적 공간에 벽돌을 쌓아올리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서혜영에게 벽돌은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원자이자 그의 조형 세계를 축조하는 기본 단위이다. 그의 창세기는 벽돌이 있으라는 태초의 명령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벽돌은 말 그대로 벽을 쌓아올리기 위한 재료이다. 벽돌을 쌓는 행위는 벽을 세우는 작업이다. 그리고 벽을 세우는 행위는 공간을 분리하는 동시에 결합하는 역설적인 작업이다. 벽은 안과 밖을 분리하는 경계이지만, 바로 그 경계를 통해서만 안과 밖이 특정한 관계를 이루며 서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분리하는 척력과 결합하는 인력이 서혜영의 벽돌에 담긴 두 역설적인 힘이다. 이 힘들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다종다양한 효과들이 바로 그가 벽돌로 축조한 세계의 무늬인 것이다.

벽돌이 분리하고 결합하는 안과 밖은 여러 층위에서 변주된다. 벽돌은 실내와 실외 사이의 벽, 체내와 체외 사이의 벽, 내적 자아와 외적 세계 사이의 벽, 개인 심리학과 집단 사회학 사이의 벽,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벽, 실재와 재현 사이의 벽 등 다양한 층위의 경계를 모두 은유하는 시각적 모티프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벽은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미학을 관통하는 보편적 구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서혜영의 벽돌은 풍경(자연)과 건축(문화)을 가로지르는 벽이 되기도 하고, 밀실(사적 공간)과 광장(공적 공간)의 경계가 되기도 하고, 생명체의 안과 밖을 가르는 피부가 되기도 하고, 재현된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경계이자 관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벽돌이 있었다. 그리고 벽돌이 모여 경계(벽)가 들어섰다. 빛이 생겨남으로써 낮과 밤이 나뉘고 궁창이 만들어짐으로써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구분되었듯이, 내부와 외부, 자아와 세계, 풍경과 건축, 재현과 실재도 애초부터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벽’이라는 사이 공간이 먼저 생겨남으로써 그 모든 분리와 결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혜영의 벽은 이처럼 분리와 결합을 반복하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은유한다. 기원에 대한 관심이 드로잉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예술적 몸짓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혜영은 한국과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이번 전시에서도 여러 벽돌 모티프의 조각을 선보이지만, 그의 작품세계에서 드로잉은 조각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평면 위에 선을 긋는 드로잉의 행위는 이차원적 세계에 ‘벽돌’을 쌓아올려 경계를 만들고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고 결합하는 창조의 근원적 순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무한히 증식하는 벽돌 조각도 삼차원의 공간에 벽을 ‘긋는’ 일종의 드로잉일 수 있다. 그에게 드로잉은 이차원적 조각이며 조각은 삼차원적 드로잉인 셈이다. 드로잉에서의 난제가 조각을 통해 해답을 얻기도 하고, 조각이 궁지에 몰릴 때 드로잉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창조의 근원을 이루는 경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 경계는 조밀하고 불투명하기는커녕 많은 구멍을 지닌 반투명한 경계다. 그것은 막(幕)이나 피부에 가까운 것이다. 서혜영이 창조한 세계의 경계는 이쪽에서 저쪽이 비치는 반투명한 막, 신체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외부의 양분을 체내로 통과시키는 피부와 같다. 실제로 그의 조각의 촘촘한 벽돌 모티프들은 직사각 형태의 수많은 작은 구멍이기도 하며, 그가 이번에 선보인 붉은색의 드로잉은 여러 장의 반투명한 인화지에 그린 드로잉들을 차곡차곡 겹쳐 놓아 은폐되기도 하고 노출되기도 하는 선의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만약 그 경계가 너무나 조밀하고 불투명했더라면 이편과 저편의 관계는 분리가 아니라 단절로 치달았을 것이고, 반대로 너무나 성기고 투명했더라면 여러 층위의 이분법적 대상들은 서로 결합하는 게 아니라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혼합되어 버렸을 것이다. 단절이나 혼합으로 치닫지 않고 분리와 결합의 유희를 지속시키는 경계, 모형(ectype)과 통로(passage)의 성질을 한꺼번에 지닌 경계, 그것이 서혜영이 벽돌로 쌓아올린 경계의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완전한 고립도 없고 완전한 개방도 없다. 밀실의 어딘가는 늘 광장으로 트여 있고, 광장의 어딘가에는 항상 밀실과도 같은 사각지대가 있다. 재현으로 틈입하는 실재와 실재로 육박하는 재현이 마치 무염수태와도 같이 매개 없는 월경(越境)을 지속한다. 투명과 불투명 그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는 반투명한 세계의 근원으로서 이 경계는 매순간 긴장을 유지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먹줄을 튕겨 그은 힘있는 선의 긴장감이 그 팽팽한 경계의 균형을 시각화한다. 이것이 바로 ‘긴밀한 경계’의 전모가 아닌가 싶다.

때때로 과거에 작가는 벽돌 사이로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겹쳐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아무런 형상 없이 그저 벽돌과 선과 색만으로 이 긴밀한 경계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금욕적인 자세는 어떠한 구체적 형상도 미처 생성되기 이전의 진정한 창조의 근원으로 성큼 다가서려는 작가의 의지로 읽힌다. 대신 그는 조각에 색을 입히는 실험을 감행한다. 때로는 전혀 다른 색의 벽돌 구조들이 서로 결합되기도 하고, 때로는 명도와 채도가 다른 여러 노란색의 벽돌 구조들이 중첩되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는 벽돌로 쌓은 경계를 시발점으로 삼아 빛과 색의 생성과 분화의 순간까지 포착하려 한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소소의 공간은 빛과 색의 실험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통유리를 통해 풍경에서 건축으로 진입하는 자연광이 서혜영의 조각과 만나 빛과 색의 다채로운 분리와 결합을 가능케 한다. 결국 그가 벽돌로 쌓아올린 경계들은 무한한 분리와 결합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비밀스러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Haiyoung Suh is an artist working with bricks. Her consistent motif has been bricks for over 15 years now. Forms of work might differ – drawing or sculpture – but the first step in her creative work was to stack up bricks in a 2-dimensional or a 3-dimensional space. For Suh, a brick is the smallest atom as a component of the real world and a basic unit to make a sculptural work. Her book of Genesis starts with God’s first command, “Let there be bricks.” A brick is literally a material to stack up a wall, which is a work of mounting a wall. The act of mounting a wall is a paradoxical work of separating and combining the space at the same time. A wall is a perimeter to distinguish the inside and the outside, but only through which can both sides form a specific relationship. The repulsive force of detachment and the attractive force of attachment are the two paradoxical forces embedded in her bricks. Multifaceted effects generated by the intermingling of these forces are the pattern of the world she constructed using bricks.

The inside and the outside that are separated and combined by bricks vary on multiple layers. Bricks are understood as a visual motif that metaphorizes all the boundaries of walls between the inside vs. the outside, the inner body vs. outer body, the inner self vs. outer world, personal psychology vs. collective sociology, a personal space vs. a public space and reality vs. representation. In this perspective, bricks are the mechanism of universal composition penetrating into physics, biology, psychology, sociology and aesthetics. Suh’s bricks could be a wall that crosses the landscape (nature) and the architecture (culture), a perimeter between a private room (a private space) and an open plaza (a public space), a skin dividing the inside and the outside of a living creature, and a perimeter and a gateway of a represented world and a real world.

Therefore, bricks have been with the mankind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Bricks were gathered together to make a perimeter (a wall). The light came in, separating the day and the night and creating firmaments, which divided the water below firmaments and above them. The inside and the outside, self and the world, landscape and architecture, and representation and reality were not there from the very beginning: all sorts of division and combination came into being with the creation of a space which is a ‘wall’. Suh’s wall is a metaphor of the origin of all objects that undergo the repeated course of separation and combination. It is natural that an interest in origins is developed into the most fundamental artistic gesture, which is ‘drawing.’ Suh majored in sculpture in Korea and Italy, and showcases sculpture as the motif for bricks in this exhibition. Yet, drawing is as important as sculpture in her art universe because the act of drawing a line on a white empty plane is the fundamental moment of creation where ‘bricks’ are stacked up in a 2-dimensional world to make a perimeter, separating and combining here and there – a fundamental moment of creation. In a way, the brick pieces that are endlessly growing in number could be a part of ‘drawing’ on a wall in a space. For her, drawing is a 2-dimensional sculpture, and sculpture is a 3-dimensional drawing. Solutions for bottlenecks in drawing are found in sculpture, and drawing will open up new channels when sculpture gets stuck.

A perimeter as the foundation for creation is not absolute. The perimeter is semi-transparent with many holes, instead of being tight and opaque. It is analogous to a membrane or the skin. Suh’s perimeter of the world is like a semi-transparent membrane where the other side is seen from this side, and the skin that protects the body from external risks and enables external nutrients to be penetrated inside. In fact, the tightly placed bricks as the motif for her sculpture are numerous small holes in rectangular shapes. Here drawing in red this time effectively shows the duality of lines that are either hidden or exposed by layering pieces of drawing on semi-transparent printing paper. If the perimeter had been so tight and opaque, the relationship of this side and that side would not have been that of separation but of rupture. Likewise, if it had been too loose and transparent, objects of dichotomy in many layers would not have been combined but overly mixed up to the extent of being unidentifiable. It is the uniqueness of the perimeter that sustains the combination and amusement without being pushed to rupture or combination, has characteristics of both ectypes and passages at the same time, and has been stacked up with bricks by Suh. Therefore, there is neither complete isolation nor complete opening. Somewhere in a private room is opened to a plaza, and somewhere in a plaza has a blind spot like a private room. The reality penetrating into the world of representation, and the representation coming closer to the reality are continuously crossing the perimeter without a medium like the immaculate conception. The perimeter as the origin of the semi-transparent world that is not skewed to either transparency or opaqueness maintains tension in every moment. The tension of the powerful line drawn by splashing an ink line in this exhibition visualizes the balance of the tight perimeter. This truly is the full account of the ‘close perimeter.’

She used to occasionally place images of people or objects between bricks in the past. However, she exhibits this time the tight perimeter with only bricks, lines and colors without any images. Such an abstinent attitude is understood as her intent to take a closer step to the genuine root of creation even before specific images were formed. Her experiment this time is to color her sculpture. The brick structure of totally different colors gets to be combined, and brick structures in various tones of yellow with different brightness and chroma sometimes overlap. As such, she tries to capture the moments of generation and division of lights and colors, starting from the perimeter stacked up with bricks. The space at Gallery SoSo where the exhibition is held seems like an optimal place for experiments with lights and colors. The natural light penetrating into the architecture from the landscape through the glass wall window encounters the sculpture of Suh, enabling diverse separations and combinations of lights and colors. The perimeters she stacked up with bricks hold the possibilities of limitless separations and combinations. At the moment when such mysterious possibilities open up, the world is exposed to us as the ‘one and its entirety.’



김성원
전시기획자

2015. 01.


2000년대 초부터 서혜영은 건축의 기본 자재인 벽돌 이미지를 모티브로 건축의 형식적 실험 을 시작했다. 그 후 서혜영은 라인테이프 벽면 드로잉, 실크스크린으로 유리나 거울에 새겨진 벽돌 이미지, 합성수지를 활용한 입체설치물, 벽돌의 3차원적 개념을 가시화하는 영상작업을 지속해 왔다.

2015년도 트러프 프로젝트는 벽돌의 공간 개념을 표현하는 ‘브릭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서혜영 작가와 함께 시작된다. 1월 20일부터 6월 20일까지 독일문화원에 있는 17개의 트러프 구조들은 서혜영의 <하나의 전체-가능 성 있는 모든 결합>과 함께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서혜영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전형적 화이트큐브가 아닌 일상적 장소 독일문화원의 특수한 조건, 구조, 상황을 해석하며 일반인들과 예술과의 풍요로운 교감을 유도할 수 있는 작업을 제안한다.

김성원(이하 김): 작가 서혜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브릭 라인테이프 작업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라인테이프, 합성수지, 영상설치 등을 통해서 ‘벽돌 모티브’들이 공간을 가르거나 연장 혹은 변형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처음 이 ‘브릭’ 모티브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서혜영(이하 서): ‘벽돌을 쌓는 행위’ 는 건축의 기원이자 이는 인간이 물리적 환경을 극복하려는 최초의 창조행위 이며 그렇게 쌓여진 구조적 결과물인 벽이 유형적 형태를 통해 만들어내는 무형적 공간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 안에 설치된 단순화게 패턴화한 벽돌의 모티브는 우리의 시각에서 오랫동안 시각적 경험과 관념적인 해석으로 축적된 이미지인 두께와 부피를 갖는 브릭의 형상을 떠올리며 공간을 구획하는 도구가 된다.

김: ‘브릭’의 특성은 하나의 단위가 쌓여서 혹은 연결되면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게 된다. 당 신의 ‘브릭’이미지는 실제 공간과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서: 브릭의 이미지(작업)는 물질공간(실제공간)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장소’이며 브릭의 연속성은 가상의 장소가 만들어내는 비물질적인 환상이다.

김: 당신의 대부분의 작업들에서 ‘사이트’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작품과 공간 간의 상호작용 이 당신의 작업 구상에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가?

서: 사이트는 매번 바뀌지만 일관되게 그 어떤 장소도 무無에 의해서 점유된 공간임은 변하지 않는다. 작업은 무無에 의해 둘러싸여진 ‘어떤 것’에서 출발하여 사이트와 작업이 한 개의 이미지가 되는 것을 구상해간다.

김: 2014년 조선 갤러리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를 인상 깊게 보았다. 이 작업 에서는 기존의 벽돌 모티브들로 구성된 삼각형 펠트지 유닛들의 다양한 조합들이 돋보이는 작업이었다. 이 삼각형 유닛들은 모여서 기둥이 되기도 하고 조명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건 축공간에 개입하는 방식에 있어서 지금까지 브릭 라인테이프 작업과는 사뭇 다른 것 같은데... Isola 프로젝트는 당신의 커리어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서: 예술작품의 실용적인 잠재력에 대한 프로젝트였다. 건축공간에 대한 전제 역시 기본적으로 기능적인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해온 어떤 전시나 프로젝트도도 특별히 다른 의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매 번 중요하고 절실하다. 언제나 작업은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를 다듬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전시역시 작업의 과정일 뿐이다.

김: 조선갤러리 전시에서 삼각형 펠트 유닛 작업과 함께 작업도 소개되었다. 작 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석이 부착된 나무 박스들()의 자유로운 결합은 기존 벽돌 작업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가?

서: 그렇다. 작업의 연장선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2013년 놀이시작 전 전시에서 종이박스(corrugated cardboard box)로 미로를 만들면서 시작 되었고 조선갤러리 전시에서 좀 더 견고한 재료와 결합방식을 고안해 냈다.

김: 독일문화원의 다섯 번째 ‘트러프 프로젝트’에 초청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구상했는가? 설치할 작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서: 최근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삼각형 유닛이 등장한다. 기능적인 부분은 제외된 구조물로 트러프를 중심으로 한 이동의 경로를 따라서 접혀진, 펼쳐진, 새워진, 다양한 결합방식으로 조립되어 관람자가 원하는 포인트에서 관람 할 수 있다. 언제나 목적의 과정에 있었던 계단, 복도, 전실 등의 완충공간은 설치된 작품으로 인해 예상할 수 없는 ‘이동의 경로’에서 ‘이동의 목표지점’ 이 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풍경이 문화원 내부에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 이번 트러프 프로젝트의 중요 포인트다.

김: 이번 전시 <하나의 전체-가능성 있는 결합>에서도 회색 펠트지로 만들어 진 삼각형 유닛과 퍼즐게임 콘셉트가 부각된다. 이 전시는 우리를 조각들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이색적 공간체험을 제안하고 있다. 당신 작업에서 퍼즐 맞추기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서: 퍼즐의 사전적 의미에는 그림 맞추기 혹은 수수께끼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두 가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림 맞추기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해놓은 이미지대로 정답이 있어 그 해답을 풀어가 이미지를 다 맞추어야 게임이 끝나는 반면 수수께끼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이며 그 답은 하나일 수도 다양할 수도 있으며 질문만으로도 흥미로운 게임이 된다. 전시를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되는 공간은 나에게 수수께끼와도 같다. 어제까지는 나와 아무상관이 없던 독일문화원이란 곳이 오늘부터는 나에게 새롭게 개척해야할 미지의 원더랜드가 된다.

김: 장소 특정적 작업은 관객과 작품, 작품과 건축 사이에 발생하는 독특한 관계를 만들어 낸 다. 이번 트러프 프로젝트를 위해 당신이 제안한 <하나의 전체-가능성 있는 모든 결합> 역시 이러한 관계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독일문화원의 트러프 구조들이 있는 공간은 전형적 화이트 큐브 공간과 다르며, 미술을 위한 전시공간이 아니다.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미술을 보러 오는 관객이 아니다. 어학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 독일문화원 직원 및 내외부 관계자들이 주를 이룬다. 당신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관객과 공간의 이러한 특수 조건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서: 독일문화원은 정면에서 보면 하나의 건물이지만 실은 남산 중턱에 비스듬히 언덕을 타고
몇 개의 매스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태로 되어있으며 내부구조 역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구성원 역시 다양하며 독일어수업은 물론 다수의 문화행사도 진행된다. 이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특수하고 다양한 요소들은 내가 풀어야할 퍼즐의 단서이며 이미 맞추어진 조각이자 하나의 전체이다.





뒤샹 이후의 현대예술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미술제도의 문맥 속으로 옮겨놓고 예술의 지위를 부여했다. 평범한 사물(事物)이 예술 제도를 거쳐 평범하지 않은 예술의 지위로 격상된다.한편에서는, 미술관 내에서 박제되는 미술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미술관, 갤러리가 아닌 일상의 공간 속에서 제작, 전시, 감상 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대자연 속에서, 거리에서, 지하철, 공원, 식당 등 여러 ‘일상의 공간’ 속에 예술작품을 적극적으로 침투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일상 사물을 예술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예술을 평범한 공간속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과 일상의 공간이 서로 먼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갤러리나 미술관에서의 설치 및 드로잉 작업과 함께 대형건물의 로비나 사무실, 상업 공간 등에 작품을 설치해온 서혜영의 활동은 일상과 미술제도 사이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 < 사물(私物) 의 공간(空間) > 에서 작가는 ‘예술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이 일상의 한부분이 되는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말 한다 . 우측에는 천장까지 이어진 높은 기둥이 서있고, 꺽어진 벽면에는 나무와 철제 조립물들이 섞여있다. 좌측에는 두 개의 작은 조명이 내려와 있고 그 아래 중간에 나무 조형물들이 놓여있다. 삼각형을 조립해 만든 오브제는 작가가 이전에 즐겨 쓰던 모티프인 ‘벽돌’ 모양으로 구멍이 나있다. 그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나와 전구를 넣으면 조명기능을 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조명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는 감상용 오브제로 존재한다. 나무상자들은 여성사 미술관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의 의자와 등받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기대대로 누군가의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몇 개는 의자가 되고, 몇 개는 조명이 되고, 또 몇 개는 특별한 기능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블록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몇 개의 블록만으로 세계와 온갖 사물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아끼고 행복해 하듯이, 서혜영의 오브제들은 어른들을 위한 블록이 될 수 있다. 조명의 유무에 따라 기능을 넣을 수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개인전에서 서혜영의 ‘사물’ 혹은 ‘작품’ 은 화이트큐브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듯 잘 배치된 오브제들은 손댈 수 없을 듯 보였다. 즉 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가진 오브제를 보여주는 완벽한 전시공간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블록을 만난 아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기에는 다소 어려웠다 하겠다.

하지만 작가의 취지와 기대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거의 똑같이 찍어낸 듯한 디자인의 가구와 조명기구, 미학적 고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먹고, 일하고, 잠을 잔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사무가구들을 사용하고, 아파트 평수에 맞게 제시되는 좁은 선택지 속에서 물품들을 선택 ‘당’한다 . 주어진 규칙과 ‘정상’의 범위 속에서 살아가도록 권고 받듯이 말 이다. 서혜영은 자신의 미적, 기능적 선택에 따라 환경을 구축해 보자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을 둘러싼 사물들은 그저 그런 사물이 아니라, 더 특별한 사물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도 더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거라 말 한다.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었다는 소식에 서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헤이리 갤러리소소를 찾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 회색빛이 벽면에 어른거린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안개가 걷히면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캔버스와 관객사이에 쳐있던 막(幕)을 걷어낸 것처럼 말이다. 화면 안에는 사람도 있고 꽃도 있다. 한 발짝 더 다가가 캔버스 앞에 착 달라붙어서 보면, 그 표면에는 벽돌모양의 직사각형이 무수히 증식해 픽셀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 여전히 서혜영은 ‘브릭(brick)’ 의 작가였다.

‘브릭’에 천착하는 이유

일찍이 서혜영은 건축물의 기본자재로 쓰이는 벽돌, 혹은 조형의 기초단위인 사각형(면)을 모티프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거듭했다. 전시장 벽면에 라인테이프로 월드로잉 작업을 하거나, 유리판과 거울위에 실크스크린으로 브릭 이미지들을 표현했다. 좀 더 입체적으로 투명수지와 철 파이프를 이용해 대형 설치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모든 요소를 영상작업에 압축적으로 담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이은주는 당시의 작업에 대해 ‘벽돌의 이미지는 물리적 구축의 상징물이 아니라, 실제 공간을 끝없이 분화시켜 나가면서 3차원적인 중량감마저 해체해버리는 개념적이고 기호적인 이미지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원래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던 서혜영은 1996년 인사동 갤러리보다 에서 인간의 뼈를 본떠만든 입체작품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3년 뒤 브릭 이미지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또 그로부터 3년 뒤인 2003년 인화랑 개인전에서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캔버스에 제소를 칠하고 그려야하는 ‘생기초 ’도 몰랐던 그가 평면작업에 몰두한 것도 벌써 6년째다. 처음에 그림을 그리겠다던 그를 향해 주변에서 ‘용감’ 하다며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회화매체에 대한 기본적인 테크닉도 배우지 않았던 그가 어느 날 ‘뭔가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붓이 아닌 연필을 들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붓에 물감을 묻혀 그리는 것보다 연필로 바로 그리는 것이 훨씬 몸과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작가의 숨결이나, 몸 컨디션은 물론, 감정 상태까지 0.3mm의 가느다란 연필심에 실려 화면위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연필심이 ‘뚝’하고 부러져 버린다. 자기와의 싸움인 이러한 작업과정은 일종의 ‘제의식’에 가깝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야 틀려도 좀 뭉개서 해결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위에 다른 색으로 덮어버릴 수도 있다.그러나 서혜영은 종이가 아닌 특수처리를 한 캔버스에 그리기 때문에 지울 수조차 없다. 한번 틀리면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종이처럼 매끄러운 느낌보다 캔버스의 텍스쳐를 선호하기에 이러한 고생은 감수한다.

서혜영의 연필그림은 요즘같이 나날이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는 환경에서 보면 상당히 원초적인 느낌이 든다. 아직도 남아있는 원시시대 동굴벽화의 주재료가 바로 흑연이었듯이 연필은 가장 오래된 미술재료이다. “사람들은 연필을 도태된 재료로 여기지만 사실 연필이야말로 가장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재료죠. 특히 조각분야에서는 여전히 돌, 나무, 흙처럼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여전히 활용하고 있잖아요. 저에게 연필은 가장 ‘자연스러운’ 재료입니다.” 어느새 작가의 신체일부가 된 듯, 체화된 연필선 에서는 그가 작가 활동 초기에 보여주었던 설치나 영상작업의 개념적인 측면이나 마치 자를 대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라 놓은 듯 딱 떨어지는 느낌과는 다른 인간본연의 그 무엇이 표출되고 있다.

연필로만 그린 그림

“처음에는 입체를 하든 평면을 하든 크게 구분을 두지 않았어요. 캔버스로 평면작업을 한다는 것에 두려움도 없었죠. 하지만 평면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입체는 끝나는 지점이 명확하게 있지만 평면은 어디서 손을 놔야할지 애매모호 하죠. 평면의 ‘문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매력적이죠.” 이쯤 되면 페인터라 불러야 하는 건가. 헌데 연필로만 그려진 그림을 두고 페인팅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드로잉이라고 해야 할까.
색에 대한 기댐 없이, 오로지 형태와 음영으로만 이루어진 서혜영의 연필그림은 다소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어두워진 공간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조금 있으면 오히려 밝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순간처럼, 서혜영의 그림도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바라보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때 시각적 인지 작용의 문을 열어주는 키가 바로 브릭이다. 이러한 특성을 두고 큐레이터 이관훈은 최근 열린 개인전의 제목 <막>을 두고 장소를 가리는 막, 연극의 단락으로서의 의미와 함게 또 다른 막 ( 膜-인식의 막 .꺼플 )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각적 통로로 이식되어 온 브릭은 평면적 레이어 속에서 두 공간을 교차시키는 幕의 중간적인 間 (여기와 저기를 잇는 사이 또는 관계)의 역할을 하며 멀리서 보면 아련한 망점의 膜처럼 묘한 아우라를 생기게 한다.” 유기체적인 브릭 이미지가 ‘피막’으로 발전한 것이가.

이번 개인전에서는 전시장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벽화2점이 단연 돋보인다. 하루에 8시간씩 꼬박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 거대한 대형 작품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지극히 소소하다. 먼저 <밤을 위한 피에스타> 는 작가의 지인들이 작업실에 놀러 와 있을 때 찍은 사진을 그린 것이다. 거기엔 동료 작가도 있고 미술 종사자도 있다. 또 다른 <이동의 경계>는 집에서 작업실을 갈 때, 그리고 작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달리보이는 도로와 교각의 모습을 중첩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그가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작가활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여간 녹록지 않은 일이다. 전혀 다른 현실인 집과 작업실 사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괴리는 오히려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워 보인다.

일상적 장면을 중첩한 풍경

최근작에서 두드러지는 일상성은 2007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최했던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품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는 색이 있는 샤프심을 사용해 마치 최근 작업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장을 그린 <사색의 탄환>, 중년남성 뒷모습을 그린 <선명하고 강렬한 화석>, 꽃이 꽂혀있는 화병을 그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 등 역시 화면 전체에 먼저 브릭 이미지를 깔고 그 위에 계속 획을 쌓아올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작가의 눈이 브릭이 되어 ,특별할 것 없는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았다. 매일 반복적으로 접하는 일상적 장면을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은 바로 대상과의 소통이며 재맥락화 작업이다. 사실 작가는 전을 열기 얼마 전 까지 한국에 있지 않았다. 그는 2004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2년 동안 체류했다. 그리고 그가 서울에 다시 돌아왔을 때, 미술계 현장의 분위기는 미술시장 붐의 여파로 전과 판이해져졌다. 또한 40대로 넘어가는 나이에 그는 근본적으로 전환의 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원숙한 여성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미술에 대해 스스로 자유롭게 즐기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브릭 이미지 자체를 형상화하거나 투시도법의 공간과 수태고지와 같은 형이상학적 소재를 주로 다뤘다면, 이때부터 그의 작업에서 니무 꽃 하늘 사람 등 일상화된 대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작은 묘하게 중첩된 이미지들이 각각의 객체보다는 조화를 이루며 화폭자체가 하나의 풍경으로 보인다. 또한 과거 설치작업에서는 관객이 공간 속에 개입해 새로운 맥락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면 , 최근의 평면 작업에서는 화폭 안에 ‘시작과 끝’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최근 김해 클레이아크미술관에서 열린 <브릭>전에서 그는 과거 월드로잉 등 공간설치작업 사진을 파나플렉스로 인화해 불을 켜두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서혜영의 전시에서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그림을 그리지만 공간감을 잃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설치작업을 했던 전력 때문인지, 캔버스화 임에도 그는 주어진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센서’가 항상 켜 있는 듯하다. 네모반듯한 벽돌덩어리가 건축가의 손길에 의해 각양각색의 건축물로 제 몸을 얻는 것 처럼 서혜영의 브릭 이미지가 가진 조형적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과학자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의 물질을 찾듯이 미술가가 세계의 근원적 구조를 바라볼 수 있을까? 한때 서구의 모더니스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니 가능성이라기보다는 당위성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때로 그 당위성은 강박적이어서 장르의 영역을 축소시키기도 했고 걸작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와는 다르게 개인적 방식의 구조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서혜영의 작업은 정확히 회화도, 설치도, 조각도 아니다. 재료들은 캔버스와 아크릴과 연필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회화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차라리 장르들 사이에 서 있다는 편이 낫다.

서혜영의 작품을 이루는 이미지들은 희미하다. 그리고 전시제목이 그렇듯이 막처럼 겹친다. 그 겹침은 작가가 무엇을 기억하거나 기록한다기보다는 낯설게 하기에 바쳐진다. 서혜영의 작업이 낯설게 하는 세계는 일상적이고 그 일상성은 어느 곳에서나 목격되는 친숙한 것 들이다.도로, 식물, 건물, 광장 따위의 지나친 친숙함은 세계를 건성으로 보고건성으로 경험하게 한다. 오래전부터 그랬듯이 예술은 친숙함을 깨트리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서혜영은 그 깨트림을 위한 전술을 역시 일상적이고 평범한 차원에서 구사한다.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장면은 풍경처럼 구성되고 시점들은 특별히 기이하지 않으며 묘사는 상식적일 정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세계, 그래서 건성으로 보는 세계를 다시 한 번 범상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세계가 평범하게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재인식 하게 한다.
서혜영이 세계를 재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레이어, 즉 이미지의 층, 혹은 막 들이다. 그것들이 겹침으로써 평범함은 답답함에 이른다. 그 답답함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구조로 짜여있다. 서혜영의 작업은 다층적이다. 겉보기 구조도 그렇고 의미에서도 그렇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서혜영이 보여주는 카프카적 답답함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그것을 의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이 어떻게 볼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왜소함이 거기에 있다.

모든 종류의 시각이미지는 세계를 매개한다. 매개된 이미지들은 세계와 작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말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개되기 이전의 그 대상들에 관해 묻는다. 그 물음의 방식으로서 낯설게 하기는 세계를 낯선 이미지로 치환한다. 그때 재현된 형상들은 일종의 동어반복이 된다. 형식으로 동어반복은 작가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이해지고 만다. 그 안이함을 피하기 위해서 작가는 자신이 제작하는 형상들이 동어반복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식은 일종의 소격 효과를 낳는다. 즉 자신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 의도된 재현성은 관객의 몰입을 거부한다. 시선은 작품에 부딪혀 반사되고, 오히려 작품이 관객을 응시하게 된다. 아마도 서혜영의 작업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체험의 핵심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막幕>전시에서 보여주는 서혜영의 작업은 지극히 삶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작품을 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의 근원적 어원을 찾기 위한 뼈(손가락, 발가락, 쇠골, 갈비 등의 파편화된 뼈 구조를 수지로 형상화)에 대한 연구라던가, 도시 건축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최소 단위인 브릭(brick)을 조형적 형태로 행한다거나, 또한 브릭을 시간과 공간 개념에 대입시켜 다양한 구조설치형태, 오브제, 영상, 회화 등의 방식으로 취하는 모든 행위가 삶의 공간을 형성하기 위한 낱낱의 기호와 언어의 이미지였다.

서혜영은 최소한의 주체적 관점에서 모든 사물에 관한 인식의 관점을 파해 치듯, ‘뼈’를 관념의 첫 시도로, ‘브릭’을 공간 조형의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시작한다. 즉 개념적인 접근(1995-1996)에서 조형적 구조로 변형하고, 확장하고, 실험하는 방법(1997-2003)을 취하고, 이를 다시 평면으로 이동하여 장소적 관점으로 해석(2004-2007)하다, 지금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화두로 그 해석을 다시 고쳐 쓰고 중첩(2008-2010)시킨다.

16년간을 이어오며 그 단계마다 현재적 시점에서 인식되었던 무수한 맥락과 관점들은 그의 기억된 장소에 각각의 켜나 혼재된 층을 이루고 있다. 그 시간들은 ‘막幕’(장소를 가리는 막, 연극의 단락)과 또 다른 ‘막膜’(인식의 막, 꺼풀)으로 다가오며, 작가의 주관적 해석에 따른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진행된다. 밀실과 광장 사이의 시각적 통로로 인식되어온 브릭은 평면(적) 레이어 속에서 두 공간을 교차시키는 ‘幕’의 중간적인 ‘間’(여기와 저기를 잇는 사이 또는 관계)의 역할을 하며, 멀리서 보면 아련한 망점의 ‘膜’처럼 묘한 아우라를 생기게 한다.브릭은 건축물 속에서 밖으로 나갔다 평면 속 뒤의 막(幕)으로 들어왔다. ‘안과 밖과 안’으로 이어지는 날숨과 들숨의 호흡이 오랜 시간에 의한 축적으로 마치 연극적 파노라마를 연상시킨다.

시나리오 소주제들은 <밤을 위한 Fiesta 1, 2>, <이동의 경계 3>, <광장>, <사색의 탄환 3>, <폐허의 정원>, <잠재대화> 등으로 나눠진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서혜영이 매일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보고-느끼고-기억되는 것들을 오버랩 시킨 것이다. 스치는 찰나의 장면들이 매일 매일 자신의 일기처럼 몸에 기록되고, 잔영으로 남아 결과적으로 자기 집을 짓듯 각기 다른 소주제들의 내용에 맞는 레이어들로 촘촘히 치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 장면들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익히 보고 느꼈던 꽃, 사람, 광장, 도서관, 도로, 산, 건축물구조 등의 이미지들을 캔버스, 장소, 幕의 서로 다른 차원으로 은유(메타포)하여 ‘site-specific’한 구조로 가져간다. 이때, 장소는 동시대의 사회와 공간에서 발생하는 ‘결핍 현상’에 대한 반응의 결과를 상징화한 것이며, 幕은 그 결과를 응집시키는 관계인 동시에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동시성을 의미한다. 이 둘을 구축하는 캔버스는 0.2cm 정도 두께의 측면에서 발현되는 환영이자 무대이며, 작가의 몸이자 벽면이다.

특히 이번 <막>에서는 소실점들이 분산되거나 해체되어 화면 너머 幕으로 숨었다. 화면이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하며 두 개 혹은 세 개의 지점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그가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세계의 공간의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익숙하지만 낯선, 이것과 저것을 한 장소에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특성을 지녔다. 또한 다른 ‘site-specific’한 것을 일관성 있는 구조로 만든 것은 幕과 膜이다. 이 두 개의 켜로 서혜영이 인지하는 모든 공간과 현상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밤을 위한 Fiesta 2>와 <폐허의 정원>에서 의미하듯 시간과 장소를 멈추게 하는 지점은 다음의 막(幕)과 장(場)을 여는 동시에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너머의 세계이다. 이제 서혜영의 환상이 펼쳐놓은 적막하고 평온한 일상의 레이어들을 즐기면 된다.
In her solo show titled Curtain, the artist Suh Haiyoung presents works inspired by scenes from the real life. In her most recent works we find her studying bones--she shaped fragmented skeletal structures such as bones of the finger, toe, rib and clavicle using resin--perhaps in her search for the very root of art. We also find her creating various forms and structures with bricks, the most typical and smallest unit composing urban buildings. Taking this brick motif to another level, she places it in the context of a temporal and spatial concept, utilizing it to structure an installation, or as an object, or employing it in diverse art forms such as video and painting. These efforts have produced signs and linguistic images that constitute the space in which we lead our lives.

With bones as objects, Suh's approach was primarily conceptual. As she transitioned to the brick motif, her focus shifted to the phenomenology of spatial forms. In these endeavors Suh appears to be exploring the way we perceive things, while minimizing the interference of her subjectivity in the effort. She started off with a conceptual approach (1995-1996), after which she experimented with form and structure (1997-2003). She then returned to the two-dimensional plane, interpreting her object with a focus on the place (2004-2007). Most recently her theme is the everyday space of life, and she is now in the process of revising her interpretations and creating layers of them for a special overlapping effect (2008-2010).

Over the course of 16 years, numerous contexts and views had emerged and were understood from a perspective that was current at each point in time. They now form layers independently or are combined with others in the places in which they are remembered. These times stored in memory are in a way like individual acts in a play or the curtain that closes and opens to signal the change of scene. They also seem like a thin film, each when lifted leads to new perception. These moments will unfold like an unrealistic space that exists only as a function of one's subjective interpretation. The bricks, which were seen as the visual corridor between the secret room and the open square, serve as the interface between the two different spaces. Seen from afar, the bricks generate a mysterious aura like a film of halftone dots. Suh's bricks were taken out of the buildings they were part of and flown behind the curtains that are drawn in the back of the plane. The moving in and out and back in, or the alternation of inhalation and exhalation builds itself with time into a theatrical panorama.

The sub-themes of this drama are: Fiesta for Nocturn 1 & 2, , A Square, A Shot of Cogitation 3, A Garden in Ruins, and Dormant Dialogue. Each theme is composed of what the artist has seen and/or felt as she commuted between her home and studio everyday. Each fleeting yet memorable scene is recorded on the artist's body like a diary, leaving traces that pile up layer after layer. The scenes in and of themselves are quite mundane. The images of flowers, people, squares, libraries, roads, mountains, and buildings are metaphorically translated onto a canvas, a place, or another dimension of the curtain to build a site-specific structure. Place, in this context, symbolizes the response to deficiency that exists in today's society and space. The Curtain is the relationship that cohesively holds together the outcomes and the simultaneity of what is happening here and now. The canvas that serves as a platform for the Place and the Curtain is itself the phantom emerging from that 0.2cm thickness and its stage, the artist's body and the wall all at the same time.

In this Curtain, the vanishing point has been split and deconstructed, its fragments hiding on the other side of the Curtain. The pictorial plane serves as an important medium. It connects two or three points in space in a plausible way and invokes a specter of an unnatural place she pursues. There is visible irony in juxtaposing in a single place seemingly random objects that are both familiar and strange. She has also imbued a sense of consistency in what is site-specific by the use of the Curtain and the Film. The two layers are intertwined and can invoke all spaces and phenomena Suh may have perceived. As expressed in Fiesta for Nocturn 2 and A Garden in Ruins, the point at which time and place freezes is in the other world where one may go on imagining about the next Act and the next Chapter. Suh Haiyoung has laid out for our enjoyment a phantasmagoric world consisting of layers and layers of a life peaceful, quiet and mundane. We need only to accept the invitation.





서혜영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우리들이 쓰는 글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있듯이 미술작업에도 작가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2000년 이후 열린 개인전을 빠짐없이 봐왔기에 이번에도 서혜영의 작업이 어느 정도 변화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작업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캔버스 전체에 세밀하게 그려진 브릭이 아니었다면 서혜영의 작업인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브릭은 라인테이프를 이용한 벽면 드로잉, 합성수지로 만든 설치, 영상 등 그의 작업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티브다. 공간을 만들거나 가르는 브릭의 특성상 서혜영의 작업에서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 즉 내부와 외부 ,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풍경에 인물이 등장한 것은 수태고지의 도상들을 연필로 그린 2003년 작품부터다. 그러나 이 인물들도 실상은 “물질이면서 비물질적인 두 영역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간인 인간” 이라는 작가의 언급처럼 공간의 다른 얼굴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역시 이라는 제목처럼 또 다른 공간의 이야기로 읽힌다. 캔버스와 표면이 되어버린 브릭 위에 그려진 방 또는 방밖의 풍경들. 하지만 이 풍경들은 그간 서혜영이 탐구했던 관념적인 공간들에 비해 지극히 현실적이다. 책이 빼곡이 들어찬 책장, 맨드라미가 가득한 화병, 아파트 복도… 그러나 은은한 단색조의 그림들은 익숙한 듯 새롭다. 편한 듯하면서도 불편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세세하게 들여다본 풍경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으로, 이 세상 너머의 일상인 듯한 낮섦으로 다가온다. 경계선 위에 존재하는 서혜영의 풍경은 그 어느 한편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모호함을 흘린다. 동시에 그 앞에선 관객은 모호함에 홀린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 이라는 작품 제목처럼 캔버스 가득 꼼꼼하게 브릭을 그리고 그 위에 다른 형상들을 덧그린 작업들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전의 작업이 작가와 관객의 소통, 관객과 공간의 소통에 중점을 두었다면 , 지금의 작업에는 작가의 내면 소통이 또 다른 요소로 추가되었다. 일상과 더불어 보다 ‘인간적’ 인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텅빈 신전>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들여다보며 작업 과정에 대해 제목의 개연성 또는 우연성에 대해 유추해 본다. 여전히 작가의 생각을 알 듯, 모를 듯하다.





거울과 유리창은 내부의 텍스트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그들의 지향점은 다르다. 거울은 내부를 선명하게 반영(일정 정도의 왜곡은 있지만)한다는 점에서 내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반면 유리창은 내부를 희미하게 반영하고, 시선을 외부로 확장 시킨다는 측면에서 외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유리창에 반영된 피사체는 확장되는 시선을 가로막는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유리창이 필요하고,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얼룩’이 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유리창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얼룩’을 단순히 외부 지향적 시각을 저해하는 요소쯤으로 간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답을 구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얼룩’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얼룩’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유리창의 맺힌 잔상을 추적해보면 그것의 정체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이 서 있는 내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희미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마치 거울을 대면하고 있을 때와 같이 지금-여기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리창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외부 풍경이다. 그러기에 유리창은 ‘희미한’ 내부와 ‘선명한’ 외부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유리창에 항시 내재된 것이지만,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던 ‘얼룩’의 정체는 유리창이 제3의 공간임을 알리는 하나의 명확한 지표이다.

브릭(brick) 위에 놓인 익숙해서 낯선 풍경들
항상 존재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곳에 지표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작업(2002년 Sadi 윈도우 갤러리 설치 작업)으로 시작해보자. 유리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안과 밖을 구분한다. 우리는 유리창을 이것과 저것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하나의 경계선쯤으로 인식한다. 내부에서는 안을 보기 위한 창문으로, 외부에서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한 쇼 윈도우로 말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단순히 안과 밖으로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공간이 그곳에 있음을 인식한다. 그들이 중첩하며, 충돌하고, 소통하는 공간을 포착한다. 그곳은 바로 유리창 표면이다. 서혜영은 유리창이라는 2차원적 표면에 자신이 인지한 새로운 3차원적 공간을 재생시킨다. 벽돌 하나하나를 올리듯 그곳에 라인테이프(‘얼룩’)를 이용해 자신이 발견한 중첩과 충돌의 공간을 형상화 한다.
서혜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내부에 투사된 외부의 빛을 형상화 한다. 그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라인테이프가 만들어낸 내부의 그림자를 따라 또 다시 라인테이프를 붙여 나간다. 하나의 건물을 완성하듯 그는 벽돌을 쌓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이 유리창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외부를 응시하는 내가 서 있는 지점이며 외부의 빛이 투사된 지점이다. 그러기에 그곳은 유리창처럼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획에서 벗어나 있는 서로 중첩하며 충돌하고 발설하는 소통의 장이다. 이렇듯 서혜영의 작업에서 쌓여진 브릭들은 일견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유리창의 ‘얼룩’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브릭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그들이(안과 밖, 밀실과 광장 등 이분법으로 구획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상호간에 나누고 있는 소통의 언어다. 서혜영은 브릭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면서 그들의 언어를 추적하고, 듣고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 한다.
최근 작업에서도 브릭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브릭의 표현방법에 있어서 라인테이프에서 연필로(2003년 개인전에서 연필을 사용)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브릭은 그의 화면에 주요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브릭이 일정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연필로 그려진 브릭은 미세하여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그러나 화면에 굳건하게 밀착되어 있다. 즉, 캔버스 표면과 브릭은 한 몸이 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가 지금까지는 특정한 이분법적 공간을 탈주하는 출구의 지표로 브릭을 위치시켰다면, 최근의 작업에서 보이는 작가의 눈 자체가 브릭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브릭이 탈주의 지표로 사용되던 것에서 작가의 눈 자체가 탈주의 지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브릭 위에 그려진 대상들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다. 그간의 작업에서 대상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세부적 구체적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관념적 존재(마치 그림자처럼)로 제시되었다. 반면 최근의 작업은 작가의 삶과 밀착되어 구체적인 물질적 대상으로 제시된다. 그곳에는 일상의 소소한 사물, 풍경들이 자리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익숙한 대상들은 그의 정적인 화면과 조응한다. 그곳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자고 있는 아이, 작업실 주변의 풍경, 맨드라미, 오래된 아파트의 풍경, 책장 등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모두가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인식하는 주체의 시선이 닿을 때, 즉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를 할 때만이 그들이 인식소로 작동한다. 서혜영은 그곳에 자신의 시선을 부여한다. 그것은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선을 통해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대상들은 낯선 풍경으로 재맥락화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하게 펼쳐진 브릭을 타고 대상, 그리고 그것에 대면하고 있는 주체와 소통하고 있다.

제3의 공간에서 지속되어야 할 ‘생산적 대화’
유리창 너머로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관조적이고 정적이다. 그리고 그곳의 ‘얼룩’은 그것을 방해하는 저해요소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오히려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리창 표면에 생성된 그러나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의 캔버스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 붙어 있는 유리창과 다름없다. 안과 밖을 가르면서 견고하게 서 있는 벽과 같은 유리창. 그러나 브릭들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서혜영은 자신의 일상을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유리창의 ‘얼룩’을 지표로 읽을 수 있는 자가 인식한 낯선 세계가 담겨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기표를 가득하게 만든 서혜영의 언어를 따라 그곳에 자신의 의미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관객과 작가의 게임(비우고(브릭) → 채우고(브릭위에 놓인 형상) → 비우고(작가의 형상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관객) → 채우고(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올려놓는 관객) → 또 다시 비우고(그것 마저도 비우는 브릭))이 지속될 때, 관객과 작가는 작가가 발견한 제3의 공간에서 ‘생산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게임을 기대해본다.
Constructive dialogue in the third space
Looking outside at the scene beyond the window is an act that is essentially con¬templative and rather passive. The 'stain'-the mark that indicates a third space-is an element that can disrupt the act. Yet Suh hai-young intentionally sullies the trans¬parent glass with stains. By doing so she draws the viewer's attention to the space that has been created on its surface; a space that would have escaped their atten¬tion had there been no such mark. The canvas is essentially no different from a window covered with numerous bricks. The window stands firm, dividing the world inside and that which is outside, but the bricks are empty. In her latest works, Suh has filled the emptiness with her elements of her daily life. Her life may look as mundane as anybody's, but it embraces a strange realm that can be recog¬nized by only those who sees the stain as a mark of a unique space. The viewer can follow along the empty signifiants that Suh has filled and attach their own meanings to them. The artist and the viewer are engaged in a game which unfolds in an interchange of emptying and filling; i.e. emptying (the bricks)→,filling (the forms overlaid by the artist onto the bricks) → emptying (the viewer's initial response to forms imposed by the artist; the viewer perceives them to be foreign and strange) → filling (the viewer projects her own daily experience onto the forms) → and again emptying (the bricks are emptied once again, even the experiences projected by the viewer). Through this interplay the viewer and the artist can engage in a constructive dialogue in the third space that the artist has discovered. And it is precisely this exciting game that I look forward to.





원근법은 하나의 주관적 관점일 뿐 객관적 진상이 아니다 .사물이 모여 공간을 이루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위에 사물들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물리적 사물들을 초과하는 심리적 사물과 경험은 언제나 원근법과 공간적 사유방식을 배반한다. 자, 그러면 이제 회화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하는가? 서혜영의 근작들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한 일련의 답변들이다.

우선 그의 근작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격자(grid)의 사용이다. 관람자와 작품사이를 가로 막고있는 격자들은 일종의 필터처럼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습관을 재현하는 듯하다. 물리학이 세계를 한없이 분할해 원자 등의 단위를 발견해 세계를 거꾸로 재조립하려 했듯이, 회화 역시 카메라 옵스큐라 등을 이용해 화면의 단위를 인위적으로 설정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는 퍼즐조각처럼 자의적으로 분할되고 재합성 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이 카메라와는 달리 정신적, 물질적 공간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격자의 필터는 우리에게 물리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지만, 언제나 그 대상을 제한적으로 보여준다. 격자뿐 아니라 화면을 채우고 있는 작은 벽돌의 이미지들도 마찬가지로 효과를 낳는다.
요컨대 원근법적 지각은 정신적 공간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신적 공간은 물질적 공간 속으로 어떻게 틈입하는가? 한 공간 속에 다른 공간이 틈입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사이’가 필요하다. 서혜영의 그림들 안에는 수직선, 수평선, 사선 들이 그어져있다 . 어떤 선 들은 르네상스의 회랑을 연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층적인 구조를 지닌 공간의 내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선들은 하나같이 어긋난 투시도법의 선들이다. 즉 이 선들이 공통적으로 수렴하는 소실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근법에 대한 배반은 겹겹의 공간들 간의 틈을 만들어 놓는다. 이른바 ‘공간의 사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공간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인물의 형상은 작가가 수태고지의 도상으로부터 차용한 것들이다. 동정녀가 통정 없이 예수를 잉태했던 것처럼, 정신적 공간은 매개 없이 물질적 공간과 융합된다. 이 융합의 장소에서 정신적 공간과 물질적 공간의 이분법을 넘어선 ‘사이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혜영의 인식론적 물음은 이처럼 ‘사이의 공간’ 이라는 해답을 얻는다.





좀 솔직해지자. 서혜영의 작업실을 다녀온 나는 ‘그린다는 것’에 대한 미묘하고 강렬한 원시적 충동을 느꼈다. < Kissing Jessica Stein >이라는 영화에서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옛 여자 친구의 첫 그룹전람회에 다녀온 한 남자가 오랫동안 묵혀둔 원고뭉치를 꺼내 새벽까지 탈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이 장면을 불현 듯 떠올린 것은 서혜영의 작품이 내게 그러한 인터페이스를 환기했기 때문이다. 나의 잠재된 욕망을 자극한 서혜영의 작업은 연필드로잉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그리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했고 ,급기야 그리기로 돌아섰다. 아니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해오던 설치와 비디오와 같은 형식의 포기가 아니라 근본에서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심적 변화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이번작업의 매체적 변화는 단순히 형식적 혹은 테크닉적 변화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서혜영 작업의 핵심적 개념과도 잘 맞물려있다.

서혜영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수태고지’다. 잉태와 탄생은 모든 종교와 신화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 중에서도 서구문명의 거대하고 도도한 두 물줄기 중 하나인 헤브라이즘, 즉 기독교에서 파생한 수태고지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다. 보통 수태고지는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인물을 통해 신과 인간, 천국과 속세를 결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보수적인 카톨릭을 배경으로 자란 서혜영에게 이런 도상들은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처녀의 임신, 성령의 잉태, 천사의 하강 등 어린마음으로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신비가 어느새 일종의 강령 혹은 독사(doxa)처럼 암암리에 믿음이 되어버린 사실에 대해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카톨릭적 금기는 그녀를 억압했고 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이고 음성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담론들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그녀의 성정체성은 혼돈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작가에게 수태고지는 그것이 역사이든 신화이든 일종의 메타포이든 상관없다. 그녀는 단지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논리로 수많은 사람의 신념처럼 되어버린 수태고지 신화를 바탕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실제 하는 것에 의문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녀가 이 도상을 차용한 것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모티프로서의 심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수태고지에서 주목한 것은 전통적인 수태고지가 재현하는 기묘한 공간의 창출 때문이다 .예컨대 작가는 신과 인간의 만남으로 신의 영성과 인간의 육체를 지닌 예수가 태어난다는 발상을 ‘예수’라는 새로운 ‘공간의 창조’로 받아들인다. 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신이기도하고 사람이기도 하고 영혼이기도한 ‘예수’ 라는 공간의 창출은 그녀에게 경계 없이 유동하며 생성하는 공간, 즉 물리적 공간만이 공간이 아니라 영적인 공간도 공간이라는 메타포를 생산하게 한다.

수태고지의 시공간과 철학적 시선

나는 어떤 면에서는 서혜영이 프라 안젤리코나 조토의 수태고지를 패러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모티프들을 재배열하고 재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면 그가 입체적 물체들을 실제의 물질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건물은 멀리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고 모든 사물은 똑같은 비율로 표현된다. 인물은 일정한 무게를 가진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며, 마치 중력을 가지고 지상에 안착한 모습으로 보인다.게다가 인물들은 중정, 테라스, 회랑 등의 열린 구조 속에 배치된다.

그에 비하면 서혜영의 공간과 인물은 모호하다. 서혜영이 착안한 공간은 도대체 어떤 공간이라고 단언할 수 없으며 최소한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구획되고 추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진정 안팎의 구분이 모호하며, 이차원인지 삼차원인지, 혹은 사이버스페이스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인물 역시 원본과 달리 상하 좌우가 역전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중력을 잃고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조토가 영적 상상력을 물적 상상력으로 대치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을 한번 뒤집는다. 예컨대 그녀의 공간은 최소한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그림자로서 물성이 훨씬 배제된 중력이 없는 공간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의 관념적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적 상황을 완충하는 지대로서의 서혜영 고유의 심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 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그러나 새로운 일루전

그렇다면 그녀가 이 그림을 통해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주지하듯 그녀는 모더니즘이 폐기해버린 영성의 부활도, 기독교 수태고지에 대한 재해석도, 새로운 신비주의를 표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의문과 회의의 공간이던 수태고지가 창출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공간 즉 ‘어디에나 있는’ ‘ 편재하는 ’ 어떤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실상 여기서 “어디에나 있는” 이라는 의미는 “언제나 있는” 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단순히 공간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며 ’시간의 공간화‘ 라는 모멘텀(momentum)을 창조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멘텀은 이질적인 차원의 것들이 접속과 소통을 일으키는 순간이자 공간이다.
서혜영에게 갤러리 공간 자체는 하나의 캔버스이다. 캔버스의 흰면은 갤러리의 흰 벽면으로 확장된다. 마치 하나의 캔버스가 갤러리 전체에서는 하나의 점이며 선이며 형태가 되는 것이다. 요즘 작가들의 작업이 그렇듯 이 아무리 자기완결성을 가진 회화작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떤 공간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된다. 그러니 모든 작업은 사이트스펙시픽이다. 이처럼 공간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과제인 만큼 이번 회화 역시 총체적 공간에서 배치되고 접속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품들이 수태고지가 걸려있던 중세성당의 그것처럼 갤러리의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눈높이 이상의 이런 설치는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관객과는 독립적이고 자기완성 적으로 남으려는 경향이 짙다.

더구나 회화의 관객은 근본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관조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의 회화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고정된 한 고정된 시점에서 평온하게 관조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들의 초점을 계속이동하면서 볼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작가적 주체가 고려했던 관객의 개입과 더불어 작업은 완성되며, 능동적인 일루전이 창출된다. 더 이상 일루전은 작품 그 자체에 갇혀있지 않다. 이처럼 작품은 운동하고 생성하는 것이다. 그녀가 완성하는 일루전은 무한히 확장되는 경계 없는 공간, 즉 내부와 외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가 얽힌 또 하나의 복합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2001년 석남미술상을 수상하고 개최한 인사아트센터의 전시에서 나는 서혜영에게 가차 없이 말한 적이 있었다. “ 당신의 작업은‘touching’하지 않아요, 서혜영이라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군요!” 라고 말이다. 실은 이런 말을 할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기어들어가고 싶은 처절한 심정이다 .때론 비평이란 것이 눈이 되려다 안경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과감에 빠질때가 한두 번이 아니며, 따라서 회의와 자책은 기본 덕목(?)이 되었다. 어쨌거나 다행히도 그녀는 열린 태도로 경청하는 듯이 보였고 그 이후 그녀는 일종의 탈각과 진화(evolution)를 부단히 준비하는 것 같았다.물론 나는 그녀의 이번 작업이 이전작업에 비해 대단히 진보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최소한 그녀 작업에 관심이 집중했다는 나를 보며, 다시 ‘그린다는 것’의 태곳적 울렁거림으로 회귀하고자하는 그녀 특유의 근원적 욕망과 마주칠 수 있었다.

유목적 욕망으로의 회귀

주지하듯 서혜영의 이번작업에서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의 차갑고 건조한 브릭의 공간이 최소화되고 인간 혹은 인간의 시선이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캔버스에 연필로 그렸다는 점이다. 신체 혹은 손의 연장으로서 연필을 사용하여 드로잉하는 것은 ‘그림그리기’의 원초적인 단계로 스며드는 것이다. 과장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서혜영은 이번 작업에서 진정 손의 연장으로서 연필이 가지는 엄청난 에너지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진정한 몰입으로 유도, 자아와 타자의 구분 없는 몰아의 경지에 이르게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설치작업을 위주로 하던 그녀가 회화로 돌아선 것을 계기로 회화만이 인간의 고유하고 원시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유일한 것임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감각만이 회화의 양도할 수 없는 고유의 몫도 아니다. 감각은 고유한 속성이나 자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회화의 가능조건일 뿐 회화의 고유한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잔이 사과를 그리면서 감각을 그린다고 말한 것처럼 혹은 베이컨이 신체를 그리면서 감각을 그린다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서혜영이 신체에 실려온 감각을 그렸다고 말하고 싶다. 감각은 체험이다. 감각은 곧 세계라는 에너지의 파장을 체험하는 것이다. 힘의 체험은 어떤 경우에든 신체적일 수 밖 에 없다. 신체를 통한 체험이 격렬할수록, 세계에 가 닿으려는 간절함이 함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녀도 “감각이란 사물의 여러 양상이 우리 신체에 일으킨 메아리를 신체가 받아들이는 느낌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메를로 퐁티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서혜영이 탁월한 감각을 일깨우는 회화작업을 통해 자신의 잠재된 능동적인 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리없이 화면에 옮겨놓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작업은 지나친 절제와 논리적 정연함으로 무장하려는 태도로 인해 건조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내가 서혜영에게 기대하는 것 그리고 바로 나 자신에게 원하는 바는, 진정 대지로부터 아직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상상력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작가에겐 결코 낭만적인 삶일 수 없는 유목적 삶으로 자신을 내몰 때 가능하다. 사막과 초원에서 촉각으로 길을 찾는 유목민의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야성적 감각의 긴장유지다. 생생한 이미지는 바로 그곳에서 탄생한다. 그렇게 될 때 존재의 증폭된 뉘앙스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다음번 서혜영의 작업실에 다녀오면 나는 도 어떤 원고뭉치를 꺼내서 밤을 지새우게 될까?





사람들은 저마다 벽을 치고 산다. 세계로부터 벽을 친다는 것은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전유하는 것이며, 그 공간 속으로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며, 그 공간 속에서 세계를 불러들여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이다. 이로서 실재하는 세계와는 단절되고 밀폐된 또 하나의 허구적인 세계를, 세계의 축소판을 축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듯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광장의 논리학과 방의 논리학, 실재하는 세계와 허구적인 세계, 사회학과 심리학이 긴밀하게 직조된 헤게모니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름하는 장치가 벽이다. 정론(logos)과 비교되는 가설(doxa), 과학에 비교되는 연금술과 점성술, 정신분석학이 낳은 무의식과 욕망, 상상력의 산물인 예술이 이런 벽안의 논리학과 깊이 연루돼있다.

21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한 서혜영은 이런 공간적이고 구조적인, 실존적이고, 심리적인 인식론적인 해석의 가능성에 천착한 작가이다. 흔히 벽은 이분법적인 문법에 기초해있기 마련이다.공간을 가름하는 고형의 틀이 그렇고, 연속적인 시각을 불연속적으로 단절시키는 불투명소재가 그렇다.

그러나 서혜영의 작업에 등장하는 벽은 양가적이다, 예컨대 투명한 수지를 이용한 입체 구조물이나 유리판 또는 투명필름을 소재로 한 벽에서 외부와 내부공간은 구분되면서 서로 통한다. 이렇듯 외부와 내부공간이 서로 통하는 벽이란 사실상 벽으로서의 조건에 위배된다. 그렇다면 이렇듯 벽으로서의 조건을 위반하는 투명한 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투명한 벽은 사적 공간에 대한 강박증과 함께 공공연하게는 그 사적 공간이 공적 공간에 의해 침해받고 있다는 공포증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흔히 벽이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전유하는 것이라면, 투명한 벽은 이와는 반대로 사적 공간을 공적공간으로 전유한다. 이로써 작가는 실재하거나 심리적인 벽의 실체를 뒤집고 해체시킨다.

CC카메라가 장착된 모니터 작업에 의해 이런 내부와 외부간의,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간의 해체된 공간 개념이 더욱 극대화 된다. CC카메라는 자기반성적인 기재 일 뿐 아니라 감시와 억압의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엘리베이터와 화장실의 (투명한)벽은 이제 더 이상 밀폐감을 보장해두지 않으며 , 나아가 그 벽을 CC카메라가 대신한다. 그런가 하면 투명 필림에 프린트한 지지대를 이용해 걸쳐놓은 벽이 내부와 외부공간을 투과할 뿐 아니라 벽의 고형성마져 해체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의 사적 공간은 불가능한것인가. 작가는 그 가능성을 알에서 찾는다. 여기서 알과 벽 구조물이 갖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태적인 공간 개념과 인공적인 공간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알마저도 그 표면에 장착된 CC카메라로 인해서 관음증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는 소외를 내제화하는 동시에 관음증으로 그 소외를 외재화 하는 사적공간의 이중성을 말해준다. 즉 소외와 과음증은 사적공간을 규정하는 동시에, 사적 공간을 공적공간으로 전유하고 변절시키는 심리적 기제인 것이다.

서혜영은 벽을 새우는 대신 해체시키는데, 그것은 벽이 더 이상 사적 공간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벽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나 기호 또는 한낱 인식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예컨대 근작에서의 라인테이프(line tape)로 축조된 가상의 벽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라인테이프로 축조된 벽은 전적으로 전시를 위한 일회용 일뿐 아니라 벽 고유의 양감(mass)마저 결여하고 있는 한낱 일루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작가가 벽을 축조하기 위해 도입한 브릭(brick)은 마치 꼬마들의 장난감 모형 쌓기에서처럼 벽의 정형성을 위협한다. 즉 브릭의 조합에 의한 벽의 형상화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사실상 브릭은 마치 세포와도 같이 모든 가능한 형상에 대해 열려진 것으로 보아야한다. 이로써 서혜영의 작업은 벽이 갖는 공간적이고 인식론적인 해석으로부터 점차 이런 소립자로서의 유니트(unite)가 갖는 가변적이고 자기증식적인 유희에로 옮아오고 있다.

어느 경우이건 그 저변에는 사적 공간에 의한 세계의 사유화가 불가능하다는 회의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





서혜영은 다양한 재료와 매체를 넘나들면서 ‘벽돌’에 대한 공간적인 개념을 작품화하는 작가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벽돌의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3차원적 설치작업과 라인테이프(line tape)를 이용한 벽면 드로잉, 유리판과 거울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하는 평면작업, 그리고 벽돌의 공간 개념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영상으로 옮긴 영상작업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업들은 기존의 공간을 구획하고 분리하여 새로운 공간을 파생시킬 수 있는 벽돌의 공간적 역할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부터 출발하였다.

2000년도 인화랑의 개인전에서 서혜영은 벽돌의 구축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형성되는 밀실과 광장, 즉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을 이미지화했다. 2001년도 장흥토탈미술관의 개인전에서 이러한 물리적이고 구축적인 벽돌의 이미지는 기호화되고 개념화된 비물질적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라인테이프를 이용하여 평면 위에 재현된 벽돌의 이미지는 새로운 공간을 계속해서 파생시키고 분화시키면서 어느 쪽의 방향도 없이 스스로 계속하여 전진하는 듯하다. 마치 세포분열과도 같이 지속적인 유니트(unit)로써 파생되는 이 이미지는 영원히 증식하면서도 결코 붙잡히지 않고 구축되지 않는 시간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한 남자가 같은 방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움직임을 계속 반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상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이처럼 구축되지 않고 끝없이 지속되는 시간적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작들에서 서혜영이 이야기하는 벽돌의 이미지는 더이상 이 편과 저 편을 가르는 물리적 구축의 상징물이 아니라, 실제 공간을 끝없이 분화시켜나가면서 3차원적인 중량감마저 해체해버리는 개념적이고 기호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현실의 벽면을 잠식하면서 전시장 내에 전혀 새로운 장을 형성하는 실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서혜영의 작업은 벽돌 이미지를 통해서 전시공간에 퍼즐게임과도 같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공간의 해석을 제안한다. 때로는 평면으로, 실제 공간으로, 혹은 영상작업으로 보여지는 공간의 다채로운 차원들을 통해서 관람자들은 벽돌의 공간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Suh Haiyoung is a unique artist obsessed with bricks. She employs a wide range of materials and media to render the spatial concept that bricks embody into an art form. Her latest projects, though diverse, share a common theme. A three-dimensional installation represents the image of bricks as reinterpreted by the artist as does a wall drawing made using line tape. Rendered with a more two-dimensional perspective is a silk screen work in which images are reproduced on glass sheets and mirrors. She has also delivered her analysis of bricks as a spatial concept in the video form. All of these endeavors have sprung from the artist’s deep interest in the role that bricks serve as they divide and separate space and in doing so create new ones.

Suh’s solo exhibition at the Gallery Ihn in 2000 was focused on how bricks physically separate space into the enclosed room and the open square outside, or the private space and the public. The physical and structural imagery of bricks and its role evident in the 2000 exhibition was succeeded by coded and conceptualized and therefore non-physical images showcased in her next solo exhibition in 2001 in Jangheung Total Museum of Art. The bricks reproduced on flat surface using line tape seem to spawn and divide new spaces, perpetually and autonomously progressing without a definite direction. These images multiply in units as if by unstoppable cell division, generating temporal space that cannot be captured nor built. Suh’s video art of a man who repeats entering and leaving a room is essentially talking about the temporal space that is non-physical and forever perpetuated.

Though Suh is still infatuated with bricks, their significance has changed. For Suh, bricks no longer symbolize the physical obstacle that partition and separate this side from the other. They are rather like signs and are conceptual, and they go on dividing space until the three-dimensional weight disappears. However, they also exist as actual images that like a network spread and take over real walls, as they create an entirely new sphere within the exhibition hall. Using her brick images Suh puts forth a multidimensional and very much complex interpretation of space that is akin to a puzzle. Sometimes in the two-dimensional, at other times as real space, and at still others as video, the works of Suh Haiyoung offers a look into diverse dimensions of space as represented by bricks.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와는 거리가 먼 장흥의 토탈미술관은 도심에서의 거리감만큼 이나 작가들의 심리적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전적으로 자연채광에만 의존해야 한다거나, 층위가 다른 다섯 개의 공간은 마치 퍼즐처럼 끼워 맞춘 독특한 건축구조가 그 자체로서 완고하기 때문이다.

이번이 세 번째인 서혜영 개인전은 그런 전시장의 복잡한 구조를 작업의 틀로서 유용하게 활용한 성공 사례라 할 만하다. 벽돌을 기호화한 검은 직사각의 선 드로잉으로 전시장의 모형을 재구성 한 뒤, 이를 근거로 분열과 증식을 거듭하여 다양한 차원의 작업을 전개한 것이다.

근래 들어 서혜영의 작업의 모티프가 되는 브릭은 일상 속에서 흔히 물리적 경계의 표지로 파악되는 물체이지만, 작가는 이를 닫힌 고형체로 보는 대신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시각적 통로로서 재인식 한다. 닫힌 것에서 열린 공간으로의 인식전환은 사물 속에 있는 무형적인 내용, 촉지 할 수 없는 무형적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노자(老子)사상의 영향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기호화한 브릭의 선구성은 곧 면으로, 공간으로 팽창되면서 전시장 전체를 감싸 안는 부피감을 만들어 낸다.
전시장 도입부에 걸린 라이트 박스들은 반사유리를 통해 일상 공간 이면의 프레임을 가시화했고, 5분짜리 필름작업에서는 한 남자가 어떤 공간을 벗어나는 즉시 다시 그 공간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 광장이자 밀실인 삶의 회로를 보여주었다. 반면 형태를 파기하고 더 나아가 브릭 너머로 시각을 관통하게 한다. 건물의 상층공간을 메운 테이핑 작업은 자연채광에 의존하는 전시공간 속에서 해가 뜨고 기우는 시간을 경험하면서 확장해 나간 월 드로잉이자, 시간의 차원을 개입시킨 일종의 퍼포먼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무의미한 허공이 호흡과 맥박 등 시간의 차원을 사는 인간존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부여받는 과정과 비슷하다.

인간 신체의 이면 지지체인 뼈를 형상화한 첫 개인전에서 그것을 사회화시켜 밀실과 광장의 문제를 제기한 2회 개인전에 이어 시간과 공간의 구조로 깊이를 더한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서혜영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구조와 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에 일관되어 있는 듯하다.





이번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서혜영전은 자연과 인공조명, 공간배분이 잘 이루어진 전시공간의 공간적 특성을 탐구하여 작가 – 공간 – 관객 이라는 설치미술의 ‘관계’ 와 ‘소통’을 적극적으로 끌어낸 전시다. 집 ,공간을 형성하는 하나의 최소단위인 벽돌은 여기서 시각적 기호로만 등장한다. 이 기표는 면으로 작용, 입체가 되기도, 비디오의 가상적 이미지로 합류하기도 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새로운 기의로 작용한다.

1층 안쪽 전시장은 단순 프레임으로 된 유리위에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가 실크스크린 되어 검은 선의 기호로만 타이핑된 벽에 일렬로 나열 설치되어 있다. 이 전시공간은 약간 어두워 사각 박스엔 불이 켜져 있고 이 그림들은 불빛으로 인해 입체적 구조가 드러나 평면과 평면이 교차되어 실제의 입체감을 제공한다. 평면의 원근법이 주는 팬터지와 실제의 공간 깊이의 공간적 유희는 TV나 컴퓨터 모니터로 보여지는 시간적 공간으로 합류되어 벽을 가장한 큰 프레임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실제와 가상의 혼란스러움으로 빠져들게 한다.

1층 아래쪽 어두운 전시공간은 벽 모서리를 경계로 두 대의 빔 프로젝트에서 보여지는 화면이 만나고 있고 카세트에서는 일상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지와 실제가 혼란스러운 넓고 빈 공간에서 인물들은 혼자 앉아있거나 혹은 출구로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하고 카메라를 쳐다본다.
작가는 이런 일상적 반복에서 출구와 이미지 속에 투영된 빛으로 된 다른 공간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자연광선이 들어오는 천장이 높은 공간을 이용해 벽돌로 프린트된 엷은 천으로 집을 지었다. 기호로만 작용되는 이미지에서 현실의 집으로 탈바꿈한 공간은 얇고 부드러운 천을 투과해 들어오는 빛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딱딱한 단위의 사각형은 천의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인해 흘러내리고 유동적이 되어 바람, 공기, 빛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을 건축한다.

2층 전시장은 벽면과 모서리에 천으로 제작된 집과 미술관의 구조를 응용한 이미지를 테이프로 그려 놓았다. 실제 공간에 가상적 이미지로 팬터지라는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번 서혜영 전은 공간을 선과 면의 브릭으로 디지털화시켜 평면, 입체, 시간, 현실과 가상의 세계로 조합하고 분해해 겹겹이 얽혀져있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투영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서혜영의 방에는 비밀이 없다. 반투명 벽으로 구획된 4개의 방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된 통로에 의해 하나의 구조물로 통합된다. 타조알 내부에 숨겨진 폐쇄회로 카메라가 전시장 내부 장면을 모니터로 중계하는 < four rooms- forum >을 보는 관객은 , 자신을 포착한 4개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치 몰래 카메라에 은밀한 사생활이 노출된 듯한 당혹감을 느낀다.
반투명 방이나 타조알을 통해서 서혜영이 제시하는 잃어버린 사적 공간과 그것을 고수하려는 본능은, 인간본성의 탐구라는 점에서 4년 전에 선보인 인골오브제와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 된다. 하얀 캔버스위에 뿌려지거나 나무상자 안에 부착된 뼈조각들은 단순히 육체를 지탱하는 구조물이 아닌 작가의 흔적이며 이 흔적은 인간 본연의 상상, 희망 꿈을 구현하려는 작가의 기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혜영이 오브제와 설치작품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3년 전 개인전에서 보여준 인골 오브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비디오 타조알 합성수지를 주 소재로 사용하여 방을 주제화 하고 있다. 서혜영의 방은 현대 미디어 문화의 인식론적 기표이자 그곳에 기거하는 주체의 심리적 메타포로 작용한다. 웹망을 통해 프라이버시가 노출되는 미디어적 파종 속에서 방은 더 이상 자기만의 방을 그 은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정보의 공유와 함께 방은 광장화 되지만 그럴수록 현대인의 밀실에 대한 욕망은 극대화 된다. 방의 광장화와 그에 따른 밀실에의 강박적 욕구 이것이 바로 서혜영이 개념화시키고자 하는 방의 실체인 것으로 여겨진다.

<4개의 방-광장 four rooms-forum>은 투명 아크릴 판으로 둘러쳐진 4대의 모니터가 만드는 밀실이자 광장으로서의 방이다 수직으로 올려진 이 4대의 모니터가 각기 전시장 내부의 다른 장면들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크릴 벽을 장식하고 있는 30여개의 타조알들 가운데 4개가 내부에 몰래카메라(CC-TV)를 장착하고 있어 현장을 중계하는 것이다. 관객은 자신의 이미지를 이 모니터는 저 모니터를 통해 외부 전시장 장면을 그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외부가 내부로 침투하여 내부를 이루고 그 내부가 외부로 관통하면서 안팍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밀실이 노출, 광장화된다.

서혜영은 라는 비디오 설치 작품에서도 몰래카메라 메커니즘을 활용 3대의 모니터를 통해 전시장 장면들을 현장 중계하고 있다. 이 3대의 모니터는 내부회로와 전선을 훤히 드러낸채 각기 아크릴 케이스 속에 안치되어 있다. 그녀는 모니터 내부회로 하드웨어 마저 노출시킴으로써 미디어에 의한 사적영역의 공유화 현상을 실체화 , 풍자하는 것이다.

밀실, 광장의 이슈는 <광장-4개의방 forum- four rooms > 이라는 구조물 설치작품에서 재차 강조된다. 그녀는 수지로 반투명 벽돌을 만들어 메탈프레임을 한 후 그것으로 4개의 방을 만들었다. 2종류의 수지, 경화제 3가지의 촉진제를 비율로 달리해 제조한 까닭에 벽돌의 색과 투명도가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반투명체로서 외부와 내부를 관통시키고 있다. 이 4개의 방은 각각 구획되어 있으면서도 통로에 의해 하나의 구조물로 통합되고 있는데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된 이러한 이중적구조는 각기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 의해 누구나 연결되는, 즉 밀실을 광장화 하는 인터넷 문화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화라는 이름하에 밀실을 광장화 시키고 사고와 취미를 획일화시키는 인터넷 문화 또는 첨단 기술에 대한 거부의 제스쳐인양 서혜영은 원초적인 타조알을 방의 원형으로 등장시킨다. 전술하였듯이 그녀는 <4개의방-광장>의 아크릴 벽면에 타조알 30여개를 알알리 부쳐놓았다. 각각의 타조알들은 그 자체가 독립된 방들로서 이것이 광장화되기 이전의 전(偂) 문명적인 밀실의방을 유추시키는 듯하다. 알은 생명이 기거하는 최초의 방이자 그 속에서 창조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밀실의 원형이다. 광장적인 투명한 아크릴방과는 대조적으로 이 타조알 밀실은 어둡고 비좁ㄱ으며 밀폐되어 있다. 그러나 이 타조알 역시 한긑에 작은 창문과 같은 구멍을 갖고 있다. 타조알 외피를 사용하기 위하여 무정란 한쪽에 구멍을 내고 속을 빼내야했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구멍을 통해 타조알 내부를 들여다 볼수 있으며 양끝을 구멍 낸 타조알을 통해서는 다른 타조알의 구멍을 엿볼 수 있다 .타조알 밀실 역시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창문화, 광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도라도 타조알이 작가의 밀실에 대한 향수와 욕망의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녀가 타조알을 주물화 시키는 일련의 오브제 작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타조알 윗부분 꼭지점에 꼬마전등을 달고 외피에는 신체 부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하여 선반위에 진열한 외피에 꼬마전구들을 장착하여 타조알을 유사발광체로 만든 후 그것을 스텐망으로 만들어진 반투명 입방체 안에 안치시킨 등이 그 예증인 듯 그녀는 타조알을 장식하고 축원하는 제식적 행위들을 통하여 광장화된 문명의 방을 거부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여성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혜영은 3년 전 첫 개인전에서 인골연작을 발표하였다. 의료상에서 판매되는 뼈로 실리콘 주물을 만들고 그것을 수지로 떠서 제작한 척추 갈비뼈 쇠골 발가락뼈 손가락뼈 등 파편적인 인골부위들이었다 .오브제화된 인골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듯이 그녀는 이번에 타조알 연작을 통해 밀실을 향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여성적 귀소본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작업이 소재와 주재면 에서 1회 개인전과 다르다 해도 인간탐구라는 점에서 그 논리적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전자가 해부학적 신체모드라면 후자는 사회학적 심리모드로서 서혜영의 작업은 결국 인간신체와 심리를 양축으로 하는 일종의 인간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다음 작업은 신체와 심리를 하나로 통합체로 파악하는 , 신체심리모드의 새로운 인간학 아닐까.
Suh Haiyoung is holding her second solo exhibition composed of object and installation works. While she made use of the “bone object” in her exhibition three years ago, in her current exhibition, she makes use of video, ostrich eggs, and resin to express her theme of “rooms”. The “rooms” used in Suh’s work function as an epistemological symbol of postmodern media culture and at the same time act as a psychological metaphor of the rooms’residing entities. In the clout of media, all privacy is exposed via the web such that rooms no longer guarantees the personal or the intimate. The information age acts to expand rooms into forums, but this only maximizes people’s desires for personal rooms. Suh’s  “rooms” is an effort to conceptualize such expansion into forums and the ensuing desire for privacy.

<Four rooms-forum>, being at once private rooms and forums, is made up of four monitors that are surrounded by transparent acrylic. The four vertically  standing monitors simultaneously relay the happenings in separate parts of the exhibition area in realtime. Among the thirty somewhat ostrich eggs that decorate the acrylic walls, four eggs hold hidden cameras (CC-TV) from which the live broadcasts are made. As the audience roams around the exhibition, they will discover their own image successively from one monitor to the next. Here the acrylic rooms is a room within another room, but images from the exterior exhibition room are brought inside the interior acrylic room through the use of internal monitors. Images penetrating from the exterior make up the interior, but at the same time the acrylic walls make the interior room naked to its surroundings. Through  such fading of the interior/exterior boundary, the privacy of the personal interior room becomes exposed and the room becomes a forum. Suh also makes use of hidden cameras in the video installation work<Unknown> to make live broadcasts of the exhibition area using three monitors. The three monitors are each placed inside acrylic cases vividly showing the internal circuitry and wires. Through such exposure of the hardware of internal circuitry, Suh substantializes and satirizes media’s invasion and sharing of personal territory.

The issue of personal room/forum has been re-emphasized in the structural installation work of <Forum-four room>. In this work, she has created four rooms by stacking semi-transparent resin bricks around metal frames. She combined two types of resins, three types of catalysts, and hardener in different ratios to produce bricks with varying shades and transparencies. These bricks made the interior and exterior of the rooms transparent from one another at different levels. Although the four rooms are partitioned from one another, the common aisle unites them into a single structure. Such independent and yet connected duality structure appears to be a metaphor for today’s internet culture in which everyone is isolated and yet connected, that is, the personal room is expanded into a forum.

In a gesture of rejection to both the psyche, which expands the personal room into a forum in the name of globalization, and the internet culture, which homogenizes all thoughts and hobbies. Suh introduces the natural ostrich egg as an archetype for private rooms. As noted above, she arranged egg thirty or so ostrich egg along the acrylic wall face of <Four rooms-forum>. Each ostrich egg, each an independent room, appear to analogize the pre-civilized private room prior to becoming a forum. The egg at the same represents the original room where life resides and the prototype for the private room in which the mystery of creation takes place. In contrast to the forum-type transparent acrylic rooms, the ostrich egg private rooms are dark, confined. and closed. However, even the privacy of the ostrich eggs are exposed through small holes at the ends of the eggs which were punctured in order to extricate the contents of the eggs and use the outer shells. These holes become windows for the audience to peer inside the eggs. In order to satisfy the voyeuristic desire of the audience, the ostrich egg room has made itself open and into a forum.

Nevertheless, it is clear that the ostrich egg is being used as a metaphor of the artist’s nostalgia and desire for personal rooms. This is plainly evident in her series of object works that fetishize ostrich eggs. In her works,<Unbar>, ostrich eggs with small lamps installed on their crowns and silk screens of fragment body images pictured on their shells are exhibited on a shelf. And in the work,< The roof garden>, ostrich eggs with small lamps coated on their shells transforming them into luminous bodies are placed inside a semitransparent cube made form stainless steel netting. As exemplified by these works, through the ritual of decorating and celebrating the ostrich egg, Suh expresses her distaste for the civilized room that has become a forum and provides an alternative, a feminine alternative.

In her first solo exhibition three years ago, Suh presented a sequence of “bone object” works. After making silicon resin casting from bones bought at medical dealerships, she cast-formed various fragment pieces of human bones including backbone, rips, collar bone, toe bones, and finger bones. In the same manner of discovering the human form or traces of oneself through the “bone objects”, the ostrich egg objects were used in her current exhibition to express the human instinctive desire for personal rooms and further  the feminine homing instinct. Although the subject and theme of this exhibition may differ from her previous exhibition , a logical link can be found between the two exhibition from the perspective of humanistic investigation. If her first exhibition is in anatomical “body mode”, then the current exhibition is in sociological “psychology mode”. In this  sense, Suh’s work in ultimately a human study with the body and the psyche being its two axes. Perhaps her next exhibition will be an expression of a human study in an integrated “body and psychology mode”.





어느 적막한 오후, 갑자기 전화벨리 울리고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00어린이 집이죠? 00초등학교2학년1반에 다니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막힘없이 말을 건넨다. 놀랍게도 그는 아이가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의 친구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등 뒤를 돌아본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두터운 콘크리트벽이 둘러쳐지고 견고한 철문이 달린 아파트 공간도 그를 피할 수는 없는 듯하다. 어쩌면 소파 한구석 , 벽 한 모서리에 작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보험판매사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아이의 안전과 장래를 걱정하는 듯한 부드럽고 친근한 그 목소리는 갑자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미래까지 마음대로 조종하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처럼 오후를 무겁게 짓누른다.

숨어있는 눈, 통제의 공간

서혜영의 작품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시선에 의한 통제가 빚어내는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네 개의 모니터를 쌓아 만든 스크린 앞에 무심코 다가선다. 그러나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순간, 자신이 그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관객을 갑자기 복병처럼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관객이 찾던 카메라는 보이지 않고 한참 만에 투명한 아크릴 판을 뚫고 나온 둥그스럼한 타조알에 아주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음을 발견한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그 타조알 안에 작은 눈구멍 같은 렌즈가 설치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은 너무나 많아 렌즈가 숨겨진 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그리고 숨겨진 렌즈는 관객의 곤혹스러워하는 이 순간마저도 고스란히 포착한다.

전시장에 설치되어있는 서혜영의 집도 마찬가지다 벽돌크기의 검은색 테두리가 일정하게 반복되는 그의 집은 언 듯 보기에 주택가의 빨간 벽돌집처럼 낯익다. 그러나 그 벽은 우리를 감춰줄 수도, 숨겨줄 수도 없는 반투명 합성수지다. 외부의 시선을 피해 서로 맞물려있는 방을 다라 도망치듯이 안으로 들어가지만 방은 끝내 황량한 외부로 다시 우리를 이끌어내고 연이어 있는 방들 그 어디에도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전시장 한족 구석에는 같은 반투명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상자들이 아무렇게나 마룻바닥에 흩어져있다. 한쪽 면이 뚫려있고 팔과 다리를 접고 앉으면 꼭 맞을 것 같은 상자는 어릴적 몇시간 이고 숨어있던 어두컴컴한 좁은 벽장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기억속의 벽장과는 달리 우리의 몸은 반투명 벽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아무리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가슴에 묻어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시선의 통제가 놀이처럼 벌어지는 서혜영의 전시공간은 낯익은 일상의 경험과 기억을 환기 시킨다. 우리는 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은행에 가거나 백화점을 가도 우리는 늘 보여지고 찍혀진다. 현금 인출기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으며 백화점과 슈퍼마켓에서도 손동작, 불안한 눈길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담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 끊임없이 감시되고 찍혀지는 우리의 모습은 수많은 정보로 컴퓨터에 입력되며, 우리가 쓰는 신용카드는 가족의 신상뿐 아니라 좋아하는 옷의 상표와 자주 가는 음식점은 어디라는 가장 사적인 취향까지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 노출된 우리의 몸

우리사회에서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구분은 없다. 서혜영이 만든 불안한 그 집과 스크린처럼 우리 몸을 숨길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회가 정보화되면 시선과 정보에 의한 통제는 더욱 정밀하고 치밀해진다. 문명의 상징인 인터넷과 카메라는 남의 방을 훔쳐보는 음흉한 도구로 이 사회를 관음증적인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우리는 은밀한 공간에서 행해졌던 어느 여배우의 성생활을 인터넷으로 보았다. 추적하는 호기심과 눈들을 피해 꼭꼭 밀폐된 공간에서 행해진 그녀의 성을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보았다. 그리고 지난해 내내 그녀의 성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나 왜 그 밀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시선이 지니는 폭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 여배우의 성을 이야기 할 때 느끼는 야릇한 흥분이 무엇인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흥분이 타자를 정보와 시선으로 지배하는 관음증적인 권력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것 역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서혜영이 연출한 전시공간에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게임이 숨바꼭질처럼 일어난다. 시선은 어디서나 우리를 쫓고 있으며 집 안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 한 낯선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은밀한 방안으로 숨어 들었던 그 여배우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노출되고 기록된다. 사적인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적인 공간이란 안전에 대한 욕구가 빚어낸 또 하나의 환상인지 모른다. 서혜영의 전시는 어디를 가든 감시하는 눈들이 있고 조금이라도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면 어김없이 단죄하는 파시즘적인 통제가 일상으로 자행되는 우리의 삶을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여느 오후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의 전시장 안에는 그래서 알 수 없는 불안과 서늘함이 감돈다.